헐리웃 복사판같은 '한국 영화'까지 포함해야 하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대한 미국 언론의 그동안 반응을 살펴보면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4관왕이 어느 날 하루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의 영화업계는 이미 지난해부터 봉 감독과 이 영화를 탄생시킨 한국 영화문화를 깊이 있게 주목하고 있었다.

지난해 10월부터 두 달 동안 필름앳링컨센터와 서브웨이시네마는 뉴욕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비롯한 1996~2003년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 가운데는 '지구를 지켜라!'와 같이 흥행과 무관하게 한국영화의 '내공'을 담은 작품도 포함됐다. 이 행사는 포브스를 통해 뉴스로도 전해졌다.

이어서 팝음악차트 빌보드의 관계사인 헐리웃리포터(THR)는 봉준호 감독과 함께 박찬욱, 이창동(전 문화관광부장관), 김지운, 홍상수 감독을 집중분석하는 기사를 보도했다.

포브스와 THR이 주목한 감독과 영화들은 공통점이 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감독과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한국 영화는 1950년대 황금기를 누렸지만 TV보급과 함께 급격히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위축됐다. 스크린쿼터가 없었다면 영화계를 상징하는 '충무로'라는 단어 자체도 행정구역만을 뜻하는 단어가 됐을 것이다.

THR이 소개한 한국 감독들은 1970~1980년대 크게 위축된 한국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3년 초에 이르는 기간, 예전에 볼 수 없던 과감한 도전을 하면서 부흥기를 이끌어냈다.

한국 영화의 거장들. 윗줄 왼쪽부터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이준익 감독, 영화배우 정진영. /사진=뉴시스.
한국 영화의 거장들. 윗줄 왼쪽부터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이준익 감독, 영화배우 정진영. /사진=뉴시스.

극장들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을 규정한 스크린쿼터는 단지 '한국영화를 더 많이 보자'는 것보다 더 큰 본연의 취지를 갖고 있다. 문화적 독자성을 수호하는 것이다.

국내 영화시장을 무턱대고 개방하면 막대한 자본력과 기획력으로 무장한 헐리웃 영화가 한 달이면 모든 한국 영화계를 장악할 수 있던 시절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사연과 정서를 담은 영화는 뿌리째 사라져 거죽은 한국인이되 머릿속 생각은 더 이상 이 나라 사람 아닌 인물이 영어대사를 번역한 것과 같은 대사만 쏟아내는 영화들이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어렵던 시기지만, 스크린쿼터를 한줄기 생명선으로 의지해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1990년대까지 명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원로 영화인들이 이번 봉준호 감독의 쾌거를 함께 기뻐하는 모습에 남다른 감동이 더해지는 것이다.

헐리웃이 '기생충'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이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영화들이 갖고 있는 자기들과 다른 특색이다. 특히 1980년대부터 미국정부가 집요하게 스크린쿼터 철폐를 요구하며 무역압력을 행사했지만, 국민과 영화인들의 단합으로 이를 지켜낸 결과물을 그들도 이제 괄목상대하게 됐다.

스크린쿼터 수호운동을 '반미' 또는 '일부 불순세력들의 선동질'로 악담했던 사람들을 참으로 무색하게 만드는 봉준호 감독의 쾌거다.

지금의 스크린쿼터는 2005년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시작되면서 이전보다 절반으로 줄었다.

이제 한국영화의 역량이 정상급에 도달했으므로 이전만큼의 절박한 필요성은 크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적 독자성을 수호하려고 긴 긴 세월 끈질기게 지켜온 이 제도의 기본취지는 어떤 형태로든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다.

다만, 최근 한국 영화에 나타나는 일부 현상과 관련해선 다시 생각해볼 구석이 하나 있다.

지극히 영세하던 영화계에 거대자본의 투자도 선뜻 이뤄지면서 이른바 '블록버스터'형 대작들이 순전히 한국 영화인들만의 힘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과연 스크린쿼터가 지키려고 한 우리의 영화인가라는 회의가 드는 것들이 있다.

시작에서부터 건물이 무너지고 주인공들은 절체절명의 찰나에서 엄청난 특수효과의 도움으로 절묘한 장면을 연출하며 위기를 벗어난다. 두 시간 가까운 관람 도중 관객들은 지루함을 전혀 못 느끼지만 끝나고 나면 '엄청난 재난이 발생했지만 주인공들이 또 이겼습니다'로 요약된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유명한 미국배우들이 등장했던 영화가 내내 떠오른다. 헐리웃에서 흔히 보는 '클리셰'들이 한국배우의 동작과 한국말 대사로 바뀌어 영화 곳곳에 가득하다.

이런 영화까지 과연 스크린쿼터의 보호를 받아야 되나가 의문이지만, 사실 이들 작품 또한 스크린쿼터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다. 엄청난 자본력이 동원됐기 때문에 제작 가능한 이런 영화는 스스로도 많은 배급망을 확보할 능력을 갖고 있다.

칸과 베니스, 아카데미 등 국제영화제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한국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아카데미는 이미 미국에서도 쏟아져 나오는 이런 영화를 굳이 한국까지 찾아가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같은 한국영화로되 이와 같은 작품들은 임권택의 '서편제'를 계기로 해서 봉준호의 '기생충'으로 중요한 기념비를 세운 계열의 한국영화들과는 가는 길이 다르다. 분명히 이런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원하는 관객도 있고 이들의 역할도 있다.

하지만 스크린쿼터와 같이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제도는 이제 헐리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작품들까지 지원 대상에 포함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 작품부터가 빈약하던 시절 국내영화를 지탱하던 제도의 도움에 의지할 이유가 없다.

단순히 국적만을 이유로 해서 문화적 독자성과 별로 관계가 없는 영화를 돕기 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중시하는 차원으로 개념을 확대해 보면 어떤가라는 제안을 해 본다. 외국 것이라도 거대자본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예술영화 역시 보호대상에 포함해 국내 영화팬들의 접근을 돕는 것이다.

이런 발상에는 여전히 '우리 먹고 살기도 힘들다'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고 그 반론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의 본질은 언제든 국제 무역협상에서 논란이 부각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란을 근본부터 차단하는 길로, 보호대상을 조금 더 확대해 볼 수 있지 않느냐라는 조심스런 생각을 꺼내본다. 칸과 아카데미를 모두 석권하는 영화를 탄생시킨 한국 영화예술이 이제 더욱 큰 거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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