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국난에 임해 오로지 국민을 믿어야만 한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조선왕조 오백년'은 MBC가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방영한 드라마 시리즈다. 이 가운데 1985년의 '임진왜란'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7년의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많은 전쟁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시는 CG 기술을 쓰기 전이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촬영은 미니어처를 활용했다. 이런 기술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임진왜란 드라마와 비교해 절대 수준에서 뒤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앞서는 면모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요즘 TV에서 '임진왜란'을 다시 보고 있다. 사극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이 명작을 방영당시 못 봤던 것은 한참 집밖에서 활동이 많았던 스무 살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관련해 조선 조정의 한 축을 맡았던 동인들은 대체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편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이란 점에서다. 동인의 대표적 인물 류성룡은 충무공에게 평생의 지기일 뿐만 아니라 전란에서 드높은 공을 세운 재상이다.

하지만 동인들에게도 임진왜란에 대한 한 가지 뼈아픈 부분이 있다. 전쟁 전 일본에 다녀온 동인의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태세에 대해 완전히 오판을 한 점이다. 함께 다녀온 서인 황윤길이 침략태세가 농후하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성일이 이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알고 있다. 드라마의 접근 방식은 이와는 좀 다르다. 김성일이 어전에서는 일본의 침략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지만 그 본심은 방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침략의 기운이 있으나 조선의 민심이 매우 불안해 조정이 전쟁대비에 나서면 더 큰 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창작물인 드라마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드라마의 이같은 접근은 아주 오래전에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중학시절의 이범증 선생님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겪고 '서울의 봄'이 무산된 그해 가을, 선생님은 예전 같으면 학생들과 함께 같은 고등학교 야구부 경기를 즐겼을 분이다. 그러나 이때는 돌연 "스페인이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도 왜 아직도 혼란한 줄 아느냐. 프랑코가 국민들을 스포츠에만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라는 생소한 말씀을 하셨다.

조금 더 지나 고입 연합고사가 임박한 학년말, 일제강점기 수업 때는 '정신대'라는 생소하면서도 당시 교과과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실을 강의하셨다. 오늘날 우리가 종군위안부로 알고 있는 일제의 전쟁성범죄다. 사춘기 아이들 특유의 어리숙한 기질로 한 구석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곧 바로 무섭게 정색을 하시며 "그 분들이 너희 어머니일수도 있고 할머니일수도 있다. 우리 민족이라면 피가 끓는 얘기다"라고 일갈하셨다.

그 순간의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인문계냐 실업계냐, 또는 진학을 포기하느냐 갈림길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일탈을 작정한 아이도 빠짐없이 교실의 70명 전원이 선생님 말씀에 모든 눈과 귀를 쏟아 넣는 공기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선생님은 상하이 임시정부 이상룡 국무령의 자손으로 물려받은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다는 기사도 봤다.

이런 선생님의 김성일에 대한 평가가 마침 보고 있는 드라마 내용과 일치하니 이를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김성일이 무조건 일본에 대해 방심한 건 아니라고 해서 그의 보고를 받은 선조의 선택이 옳았다고 볼 수 있느냐. 그건 별개 문제다.

김성일의 우려대로 전란 초기, 조선의 백성들은 매우 혼란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 경복궁을 파괴한 것도 일본침략군이 아닌 격분한 조선 백성들이었다.

김성일은 본인 또한 국난에 목숨을 바친 충신의 길을 다했다. 스스로 최전선인 경상우도 부임을 자처했고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가 병을 얻어 순국했다.

하지만 김성일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다. 백성은 국난을 맞아 혼란하긴 했어도 곧 뜻을 모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나섰다는 점이다.

100년 쯤 후의 인물인 서포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지적하듯,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간 조선은 내란의 위험도 안고 있었다. 전주 이씨 가운데 아무나 한 사람을 옹립해 텅 빈 대궐을 차지하고 새로운 조정을 선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그런 반역이 아니라 도망간 임금에 대한 충성의 끈을 놓지 않고 의병궐기로 맞섰다.

난세를 맞아 끝내 나라를 지탱하고 나선 건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 스스로였던 것이다.

광주 염주동의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 동상.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던 고경명은 임진왜란을 맞아 호남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1592년 금산전투에서 순국했다. /사진=뉴시스.
광주 염주동의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 동상.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던 고경명은 임진왜란을 맞아 호남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1592년 금산전투에서 순국했다. /사진=뉴시스.

국가는 어려운 때를 맞으면 오로지 국민을 믿고 의지하는 길 뿐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 오늘날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국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누그러뜨린 배경으로 사회적 신뢰가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근 일각에서는 현재의 방역방침을 누가 수립했냐는 것에 대해 아무 실익 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다. 지금 당장 재난을 극복하는 데는 전혀 필요가 없는 '논공행상'다툼이다. 정치에 개입하려는 의욕이 가득한 사람이 특정 정파에 완전히 감정이입된 것이 아닌지 매우 의심되는 행태다.

매뉴얼이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세상일을 해결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훌륭한 매뉴얼은 대부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관청 캐비넷 어딘가에 잘 보관돼 있었다. 관건은 그게 얼마나 잘 실행되느냐다. 그 나라의 사회적 신뢰도가 얼마나 높으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정부가 나서서 예방수칙을 강조해도 국민들이 이를 일축한다면 잘 만들어진 매뉴얼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이미 국민들이 훌륭한 공동체 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상태에서 정부가 이를 잘 요약 정리했을 때 매뉴얼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저력은 이미 한국인들이 수 천 년 역사의 어려운 시기마다 입증해 온 것이다. 역사가 깊은 나라일수록 위정자들은 국민의 저력을 믿어야 한다.

전염병의 만연이 당초 예상보다도 훨씬 더 길어졌다. 공동체 의식의 발휘가 길어지면서 국민들의 피로 누적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위정자들은 국민을 믿어야 한다. 국민들이 믿지 못할 사람들이라면 그 어떤 위정자가 이를 극복할 수 있나. 그런 국민이라면 50년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도 없다.

대단히 유감스럽게 일각에서 공동체 모두의 안위에 역행하는 집단이기주의와 나태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국가는 사심없는 엄정한 태도로 대응해야 한다. 극히 일부의 일탈이 불안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을 막는 길이다.

또한 국민들은 전례없이 어려운 때를 맞으면, 누가 더 억울하고 덜 억울한가는 공동의 고난을 극복한 뒤에 따지고 지금은 일관된 대응체계를 함께 준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난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번에 정부는 초기 단계부터 모든 정보를 최대한 공개함으로써 특히 투명성에 대해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이를 일부 개인이나 집단이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된다.

400년 전의 선조들은 임금이 도망을 갔는데도 당장은 모든 원망을 접어두고 쇠스랑을 집어들고 왜적을 물리치러 일어났다. 지금은 오히려 외신에서 하루가 다르게 한국의 대응태세를 호평하고 이를 자기나라에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일관되고 공정한 리더십으로 국민의 저력이 쉽게 피로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나갈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그동안 역사를 통해 수없이 입증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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