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국정감사에서는 카드대란이 재정경제위원회의 주요 이슈였다. 국회의원들은 피감기관인 산업은행으로 몰려가기는 했지만 질문은 오로지 카드사태 때문에 불려온 증인들에게 집중됐다.

 
유지창 산업은행 총재로서는 골치 아픈 국정감사를 거저 넘기고는 있었지만 장장 시간을 맨 앞에 돌출한 자리에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모처럼 발언시간이 그에게 돌아왔을 때 국회의원들에게 “우리 은행에 대해서 궁금하신 점은 없으세요?”라고 질문을 자청하는 이색장면까지 연출했다. 하지만 이날 출석한 LG그룹 고위 관계자들에게 빼앗긴(?) 관심을 되찾아오지는 못했다.
 
LG가 주식을 매각하기에 앞서 대주주들부터 먼저 자기 지분을 팔아치운 사실이 드러났으니 산업은행이고 뭐고 역겨운 추태부터 파헤치는 것이야말로 국회의원의 본분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김효석 의원(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이 남긴 발언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김 의원은 당시 미국계 캐피털사 한 곳이 LG카드의 대주주로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한 후 “이 캐피털사도 구씨 일가처럼 주식을 팔려고 했었지만 먼저 미국의 본사로부터 적절한지부터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고 소개했다. 
 
본사에서 보내온 답신은 ‘공시를 먼저 하고 주식을 파는 게 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본사의 방침에 따라 이 회사는 공시를 통해 소액주주들에게 자신들이 LG카드 주식을 매각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리고 나서 지분을 정리했다.
 
김효석 의원은 “이것이 바로 LG그룹 대주주와 미국 캐피털사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LG그룹 증인으로 출석한 강유식 부회장은 미리 주식을 내다 판 행위에 대해 “계열분리를 위해 적법하게 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피해를 본 소액투자자들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에서 기회이익을 바라고 투자한 사람들이 손실을 볼 수도 있는 것”이라는 뻔뻔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 순간 잠자코 지켜보던 김무성 당시 재경위원장마저 폭발시키고 말았다. 김 위원장은 “그룹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이 그게 할 말이냐”고 질타한 뒤 “사회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라며 호통을 쳤다.
 
이른바 4대 재벌이란 곳이 8년 전에 보여준 추태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회사 망하기 전에 대주주부터 지분을 먼저 파는 짓이 그때 이후 한국에서 근절된 것이 전혀 아닌 모양이다.
 
웅진그룹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직전에 윤석금 회장의 가족과 친척이 주식을 매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과연 이런 작태에 대해 금융당국과 한국 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말로는 시장경제라면서, 시장경제의 기본인 공평한 정보 공유에 대해서는 기본적 개념조차 갖추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자들일수록 평소에는 “재벌 핍박하지 마라”고 큰 소리를 치고 다닌다. 4000만 국민을 자기가 다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퇴를 들어야 할 금융감독원부터 웅진의 법정관리 신청에 된통 뒷통수를 맞은 모습이다. 김진수 금감원 기업금융개선국장은 27일 긴급 브리핑에서 “(채권은행인) 신한은행은 ‘멘붕’ 상태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1차부도 액수가 150억원이어서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걸로 봤다”면서 “그런데 갑자기 웅진그룹측에서 연락을 끊고 잠적하더니 법정관리를 신청했다”고 전했다.
 
김 국장은 “법정관리 신청은 주주나 경영진 등의 고유한 권리이기 때문에 채권은행에 알릴 의무는 없다”면서 “웅진이 숨기기로 결심했다면 당국이나 채권은행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건대, 또 한건의 ‘재벌님들 쌩쇼’가 무르익어가는 모습이다. 요즘 경제민주화 논의도 한창인데, 자본의 부도덕성에 대해서 과연 한국 경제는 이제 어떤 대응체계를 갖출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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