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관행이 축적 돼 오늘날 재벌들 처지 어려워져...스스로 극복해야
재벌 심판 때 마다 나오는 "지금같이 어려운 때" 타령, 재벌들에 도움 안돼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다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예전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가뜩이나 어려운데 수도 없이 검찰을 불려 다닌다"며 이재용 부회장을 편드는 척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의 심정이야 물론 또다시 경제에 충격을 주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오랜 무역 갈등으로 한국 경제의 저력이 쇠약해진 마당에 전 세계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에까지 시달리고 있다. 지금은 정말 "전례 없이" 어려운 시기가 분명하다.

그런데 재벌 총수 문제를 얘기할 때 "지금처럼 어려운 때"라는 단서를 달기가 참으로 옹색하고 떨떠름하다.

이 단서가 지금까지 수 십 년 동안 쓸데없이 남발됐기 때문이다. 아무 때나 튀어나왔기 때문에 정말 이 말을 써야 할 지금 쓰기가 멋쩍어진 것이다.

1987년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에 들어서면서 재벌들은 스스로 안위를 독재정권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여론에 대한 홍보를 통해 해결하려고 나섰다.

역대 정권이 총수 일가의 부적절한 행위나 탈법에 대해 단죄를 하려고 하면, 늘 "지금처럼 어려운 때"라는 단서를 다는 여론몰이꾼들이 재벌에 대한 사면을 강요했다.

한국 경제는 민주화 이후 언제나 어려운 때라고 주장할 핑계가 있었다. 1989년처럼 그때그때 주가나 무역수지, 성장률 가운데 아무나 하나를 찾아내면 "경제가 어려운 지금 같은 때"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숫자를 못 찾으면 "남대문 시장에 나가봤다"며 "예전엔 걷기도 힘들 던 시장이 이제 마음껏 걸어 다니고 있다"는 논리로 "지금 같은 어려운 때"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00년대 중반까지 재벌총수들은 '3+5' 원칙에 따라 아무리 죄를 지어도 마음껏 돌아다니며 지낼 수 있었다. 이 '3+5'라는 것은 외신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3년 징역에 5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는 법원의 관행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이 수 십 년을 이렇게 살아온 업보를 지금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모든 재벌 총수들이 짊어지고 있다. 투자자들이 응어리처럼 안고 있는 시장규율에 대해 거의 임계점에 이른 단계에서 지금의 총수들이 창업조부나 선대회장들은 겪어본 적 없는 준엄한 추궁을 받고 있다.

지금 재벌들에게는 국내투자자들의 억눌린 원망보다 더 심각한 도전요인이 있다. 해외투자자들의 동향이다.

굵직한 주요기업들은 모두 50%에 달하는 외국인 투자비율을 갖고 있다. 이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자본시장을 개방한 것이 2000년대 들어 외국투자자들에게 인정받은 결과다.

외국자본을 들여와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기업가치와 주가가 올라갔다. 주식 한 주의 가격 자체가 웬만한 서민은 사기도 힘들만큼 비싸지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비중은 더 높아졌다.

그러나 가끔씩 기본적인 투자규율이 여전히 안 지켜진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이렇게 주요기업을 지탱하는 국제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위기가 발생하곤 한다. 외국인이 다 빠져나가더라도 국적자본으로 지금의 몸집이 커진 기업들을 모두 지탱할 수만 있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그건 현실과 너무나 다른 얘기다. 한국 경제가 국민소득 1만 달러도 안되는 1990년대 초로 후퇴하는 얘기인 것이다.

그래서 기업의 잘못된 예전 관행에 대해 어떻든 사법적이나 제도적 심판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제를 오로지 저급한 진영논리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정치인 입맛에 어느 기업이 맞고 안 맞고만 따진다. 하지만 이런 건 극히 미시적 차원의 문제일 뿐, 한국의 주요기업이 국제시장에서 투자자들의 신뢰와 함께 정상적 성장을 이어가는 일은 훨씬 더 큰 차원의 안목을 갖추고 바라봐야 한다.

2016년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출석한 재벌 총수들. /사진=뉴시스.
2016년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출석한 재벌 총수들. /사진=뉴시스.

문제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행이 현재의 법체계, 그리고 시장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어긋나는 불일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 3세인 재벌총수들이 사법적으로 고초를 겪는 건 사실 당대에서 벌어진 것보다 선대로부터 누적됐거나 관행처럼 지속돼 온 것들이 더 많다.

이런 것을 해결하려면 보다 더 큰 차원에서 논의의 장이 펼쳐질 필요가 있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법의 허용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판국에 20년, 30년도 더 된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하필 재벌총수를"이란 투정만 거듭한다면 이는 전향적으로 과거 잘못을 이해하려던 국민들의 마음을 오히려 얼어붙게 만들 뿐이다.

별로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소리를 자꾸 하는 저의도 의심스럽다. 해당 대그룹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 재벌 편"임을 표시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란 비난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속된 말로 "'쉴드'를 치더라도 좀 공부해가면서 치라"는 핀잔까지 쏟아진다.

이렇게 도움도 안 되고 천편일률적인 '호위무사' 여론가들에 대해 대그룹 당사자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무조건 "우리 편"이라며 결초보은하겠다는 생각만 가득하다면 이 재벌은 참 답이 없어 보인다.

이런 참모들의 보필을 받는 그룹 총수는 지금부터 5년 후, 10년 후에는 아마 지금은 상상도 힘든 혹독한 처지를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집권자가 누구냐는 별로 도움이 못 될 것이다. 지금부터 8년 전 쯤의 일만 돌이켜봐도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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