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1998년 전철환 총재 부임 후 새로운 위상을 갖췄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한국 경제정책의 양대 수장 가운데 하나인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25대 총재다. 맞수인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과거 재무부 시절부터 따지면 59대 장관이다.

한국은행은 1950년 설립된 이후에는 재무부 2대 장관인 최순주 장관 재임 중 설립됐으므로 25명의 한은 총재는 58명의 재무장관을 만나고 있다. 정부 수립이후 전체로 봐서는 한 명의 총재가 두 명을 조금 넘는 부총리와 국가 경제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 비율은 크게 봐서 두 번 정도의 변곡점을 갖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1969년 김학렬 부총리-남덕우 24대 장관 이후 1997년까지는 재무장관의 '수명(?)'이 다소 길어져 11명의 총재와 19명의 부총리·장관이 나왔다. 1대2 비율을 밑돈 것이다.

그러나 1998년 이후 두 수장의 '장수 격차'는 다시 크게 벌어졌다.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 극복에 나선 1998년 이후 5명의 한국은행 총재와 17명의 경제부총리가 나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율이 1대3 이상으로 크게 벌어진 것이다.

이는 한국은행 총재들이 4년 임기를 확실하게 다 채우기 시작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제는 대통령이 새로 선출돼도 전임 대통령 때 임명된 한국은행 총재는 당연히 임기를 완수하는 것이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오히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주열 총재는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2018년 새로운 4년 임기의 재신임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을 임명하기 전까지만 해도 20년을 훨씬 넘게 전 정권이 임명한 Fed 총재를 최소 한 번은 연임시키고 있었다.

한은 총재의 철저한 임기 완수 전통이 자리 잡은 덕택에 이주열 총재는 48년만의 연임총재라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이는 1998~2002년 재임했던 고 전철환 총재의 발자취가 너무나 확고한 덕택이다.

젊은 시절 행정고시 합격 후 잠시 경제 관료로 일했던 그는 유학을 다녀와서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한은 총재로 부임한 것은 1998년 3월이다. 이 때 이후로 한은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 4년, 또는 8년 단위로 같은 날짜에 새로운 총재의 부임일을 맞고 있다.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전철환 총재 부임 당시 한은은 IMF 위기뿐만 아니라 은행감독권 개정의 엄청난 폭풍에 빠져있었다. 한은의 산하기관으로 은행을 감독하던 은행감독원이 떨어져나가 금융감독원으로 합쳐지고 금융감독위원회(현재의 금융위원회) 산하기관이 됐다. 한은 영역의 기관이 관료조직의 영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한국은행 사람들은 이 충격이 너무나 컸다. 당시 한은에서는 금감원 소속으로 옮겨간 동료들에 대해 "북송선 탔다"는 자신들만의 은어로 충격 받은 심정을 표현했다.

전 총재의 전임자인 이경식 총재는 엄청난 내부반발에 시달리다 사퇴했다. 한은 사람들의 실망은 총재 한 사람 퇴진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시 핵심부서에 근무했던 일부 인사들도 은행감독권 개편을 막을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발로 한동안 외직을 전전하기도 했다. 이경식 총재는 퇴임 후 한동안 그의 초상화가 한국은행에 걸리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철환 총재는 한국은행 직원들에게 새로운 사명감을 부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채권시장의 확실한 관리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국은행의 위상이다.

금융통화위원회 회의가 열릴 때마다 국내 출입기자들뿐만 아니라 외신기자들까지 대거 몰려와 금통위 발표가 날 때까지 데스크와 연결된 전화를 열어두고 있는 것은 '전철환 시대' 이후에 생긴 모습이다.

1999년부터 채권 유통시장이 생겨나고 한국 국채가 전 세계 정상급의 우량자산이 된 것은 전철환 총재의 확고한 시장철학과 '한번 안한다면 절대 안한다'는 원칙주의, 그리고 이를 수긍하고 받아들인 재무부처의 협력이 밑바탕이 됐다.

중앙은행 총재는 금융시장에서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경제지표로 받아들인다. 복잡한 경제상황의 핵심을 투자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공평하고 일관되며 정확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전철환 총재의 경제진단에는 자신을 임명한 통치권자의 정치적 이해가 섞이지 않았다. 이것이 2001년 어느 날 '호텔전쟁'에서 그가 압승한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날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은 총재와 경제부총리가 엇갈린 진단을 내렸는데 금리와 주가는 총재 한마디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2월 콜금리를 올릴 정도로 소신을 과시했는데 이 때문에 정권 일각에서 총재교체설이 나왔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전혀 다르게 한은 총재는 아무 때나 해임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절이므로 개연성은 있는 얘기다.

당시 국정감사 등의 현장에서 전 총재가 보여준 모습은 '꼭 필요한 얘기만 정확하게' 하는 것이었다. 인맥을 과시하기 위해 의원들의 덕담에 과도하게 호응하다 면박당하기커녕 오히려 의원들의 공치사 유도를 쌀쌀하다 싶을 정도로 자르면서 시장에 관한 의견만 피력했다. 야당 의원들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섞을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오후 4시가 넘으면 국정감사장엔 질문하는 의원만 남겨놓고 많은 의석이 비어있었다.

시장에 있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사심 없는 인물'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능력이 출중해도 정책당국자의 사심이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 총재의 결벽스런 성격에는 있을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총재 임명받던 당일로 두 아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퇴임 때까지 한 주의 주식도 새로이 사거나 팔지 말라고 엄명했다. 두 아들은 그가 총재로 있을 때 장가들었지만, 전 총재는 아들의 결혼식 때마다 한국은행 내에 절대 알려지지 못하게 막았다. 둘째 아들은 훗날 자신이 장가가던 날에 대해 "친척 어른들만 정말 많이 오셨다"고 기억했다.

한국 경제정책사에서 이처럼 시장의 신뢰가 드높은 인물이 탄생하니 정부는 그의 임기 후에도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총재연임을 시켰어야 되는데 이것은 또 고위층의 '일자리 섭리'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대신 가장 신망 있는 인물이 나서서 첨예한 갈등을 조정해줘야 할 공적자금관리위원장 자리를 다시 그에게 맡겼다.

2002년 4월 한은 총재에서 퇴임한 후 두 세달 쯤 지난 여름, 그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 회의에 위원장으로서 서류가방 하나를 들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나타났다. 그 해 겨울 같은 건물에서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기자가 그를 만난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다.

2년 후 여름, 그가 돌연 타계했다. 수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18일이 솔뫼 전철환 선생의 16주기다.

한은은 지난 12일이 한국은행 창립 70주년이라며 이런저런 일들을 홍보하고 있다. 이 나라 중앙은행의 위상을 앞으로 그 누구도 폄하할 수 없게 시장의 힘으로 우뚝 세운 전철환 총재에 대해서도 아마 생각이 닿는 사람은 저마다 마음 속에 간직하고는 있을 것이다. 18일이 16주기라는 사실은 인식을 못하더라도.

시장의 투자자들이 한국은행에 실어주는 힘은 공정하고 빈틈없는 시장관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은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은행감독권을 누가 행사하느냐에 대해서 투자자들은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훌륭한 금융감독체계를 위해 올바른 감독제도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사심 없는 명망가들의 현명한 지혜를 모아 계속 개선해가야 한다. 그러나 중앙은행 본연의 사명은 이보다 더 큰 시장의 안정적인 관리에 있다. 최고의 한국은행 총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기에서 답이 나온다.

세월이 오래 지나다보니 당시를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사실관계를 이상하게 전달하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인사에서 학연을 중시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전철환 총재가 절대 들을 수 없는 얘기라는 것이 당시 한은을 취재한 경험이다. 이 또한 언젠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일이다.

돌아가신 지 벌써 열여섯 해인데도 여전히 그에 대해 할 얘기들이 많다. 그의 발자취가 워낙 커서인지, 그가 떠난 자리를 충분히 채우지 못해서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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