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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이 '보수'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정당이 '보수'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 장경순 기자
  • 승인 2020.06.21 15: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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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특정 정당의 전유물도 아니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미국의 1861~1865년 독립전쟁을 이끌어 노예제도 폐지를 쟁취한 것은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다.

미국의 공화당은 인류의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투쟁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운 정당이다. 그런데 요즘의 공화당 이미지는 이런 자랑스런 역사와 뭔가 어긋나고 있다.

당시 국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남부연합의 깃발과 남부군 사령관 동상을 지금도 자랑거리로 여기는 사람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현직 공화당 대통령이 이들을 공감하는 듯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를 경제구조 변화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19세기 미국이 농업중심에서 상공업중심 경제로 전환하는 시대적 변화를 앞장 선 것으로 해석한다.

상공업 경제 속에서 발달한 미국경제는 미시간 등 오대호 인근 지역에 공업중심지인 '러스티 벨트'를 만들었다. 이 지역이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특정 경제체제를 대변하는 공화당의 속성에는 변화가 없다.

보수와 진보는 경제를 정치로 옮긴 개념이다. 새롭게 등장해야 할 체제를 대변하는 정당은 그 무렵에는 진보적 정파가 되는 것이고, 그 체제가 정착했다가 또 다른 새로운 체제의 도전을 받게 될 때는 기존체제의 이해를 보호해야 하니 보수적 정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를 대변하는 정당이라면 보수와 진보에 얽매일 수가 없다. 또한 보수와 진보가 어느 정당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 당은 무조건 보수만 해야 된다"는 주장은 때로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자신들은 무조건 기득권세력의 편만 들겠다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열린 토론회 현수막. 정치의 목적이 보수 또는 진보를 선택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뉴시스.
정치권에서 열린 토론회 현수막. 정치의 목적이 보수 또는 진보를 선택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뉴시스.

한국은 19세기 제국주의 침탈과 20세기 냉전에 따른 분단과 처참한 전쟁을 겪었다. 한국은 북한의 남침위협을 막는 방법으로 단시간 내에 경제를 집중적으로 성장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이 방법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대단히 큰 성공을 거뒀다.

1970년대부터 거세지기 시작해 1980년대에 결실을 이룬 민주화운동은 독재자들 억압이 민중학살에 이를 지경이 돼서 당연한 저항권의 발동으로 쟁취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민주화는 한국사회의 발달에 따른 경제사회적 변화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소수 엘리트가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성장을 가져올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통치자가 원칙을 무시하고 특정인에게 돈과 자원을 몰아줘봤자 더 이상 거기서 나올 성장의 여지가 없어졌다. 그에 반해 공정성의 훼손으로 불이익을 받은 다수 대중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마침내 독재정치를 몰아내는 투쟁이 먼저 이뤄졌고, 이어서 노동현장의 불평등과 착취 개선, 그리고 금융시장에서 모든 자본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지배구조 개선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이전 체제의 폐습을 근절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건 좋은데, 과거 체제가 이끌어오던 발전은 무엇으로 대체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새로운 체제의 정착은 바로 이점이 관건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억지로 경제체제 진화를 거부하려다가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를 겪었다. 큰 기업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라는 '대마불사'에 집착했다가 국가전체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부도직전 사태로 몰렸다.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재계의 신진대사는 부진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전과 달리 굵직한 재벌의 퇴출이 발생하기도 하고 네이버와 카카오 등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한다.

2020년 한국 주류들은 1990년대 이전의 주류들과 상당부분 얼굴도 바뀌고 성격과 그들이 쓰는 어법도 바뀌었다. 정치에서 '주류'를 대변하려고 해도 지금과 30년 전과는 그 대상이 바뀌어 있다.

예전의 보수와 진보논리를 지금 그대로 갖다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서 '보수' 또는 '진보'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단어가 주는 선입견만 챙기려는 말의 유희에 불과할 수가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보수'는 '반공'이고 '진보'는 '용공'이라는 1970년대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놀이'와 '진보놀이'의 맹점은 미국의 공화당이 보여준다. 체제가 소임을 다하고 더 나은 체제로 진화를 하면 예전의 진보세력이 당연히 보수가 되는 것이다. 이미 한참 전의 보수였던 세력이라면, 이제 더 이상 그런 체제는 가동력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새로운 체제에 대한 과학적 고민을 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일이다.

특히 한국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방역하는 과정은 불가피하게 '큰 정부'가 등장하게 되는 미래의 모습을 엿보게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오랜 세월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미국 공화당의 통치모습 변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러 관념들이 변하고 있는데 세상 바라보는 눈을 수 백년 묵은 틀에 묶어둬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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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2020-06-21 16:34:05
오랜만에 아주 수준 높은 기사를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