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불명예' 후버와 달리 영예롭던 세월 보내던 윌슨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스탠퍼드대학교의 대표적인 건물은 메모리얼처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메인쿼드다. 아라비아풍이 결합된 석조 건물 회랑이 사각형 형태로 넓게 펼쳐져 있다. 이 학교는 주요 지진대가 지나가기 때문에 높은 건물을 찾기 힘들다. 그런 가운데서 가장 높게 지어진 건물이 후버타워다.

이 학교의 후버타워와 후버연구소는 이 학교 출신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기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후버는 잘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로서는 이게 더 다행일수도 있다. 후버는 1929년 대공황 발생 당시 대통령이다. 미국에서는 최악의 대통령으로 후버를 고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불운했던 사람"이란 평을 덧붙이기도 한다. 위키피디어는 몇몇 조사에서 그가 바닥으로부터 세 번째로 평가됐다고 전한다.

인간적으로 훌륭했지만, 한마디로 무능했다는 평을 받는 편이다. 공화당 소속인 후버는 1928년 당선돼 다음해 취임하자마자 대공황을 겪었으니 임기 4년을 대공황의 충격에 짓눌리며 보냈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 재출마했으나 앞선 당선 때 지지율보다 26%포인트 떨어진 39.7%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선거인단 대결은 더 처참해 6개 주에서만 승리한 59 대 472로 낙선했다.

그를 떨어뜨리고 당선된 사람이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다. 루즈벨트는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국민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공화당의 후버에 대한 실망은 대공황 극복, 그리고 몇 년 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대한 미국인들의 열망이 더해져 루즈벨트의 장기집권을 가져왔다. 루즈벨트의 당선은 경제문제로 인해 정권교체가 이뤄진 가장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루즈벨트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세운 삼선 불출마의 관행을 넘어 4선에 성공했다. 그는 네 번째 임기를 수행하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을 앞두고 서거했다. 

후버 입장에서는 대공황 대통령으로 유명할 바에야 차라리 덜 유명한 편이 나을 것이다. 허버트 후버보다 전임 대통령은 아니지만 매카시즘으로 악명을 떨친 에드가 후버 전 연방수사국(FBI)장이 더 유명할 것이다.

스탠퍼드는 1891년 세워져 미국의 최정상급 대학 가운데서는 역사가 짧은 편이다. 그래서 이 학교 출신 미국 대통령은 아직 후버 한 사람이 전부다. 존 F 케네디가 스탠퍼드 비즈니스 스쿨을 다녔다고 하지만 그는 청강생이었다. 이런 스탠퍼드가 케네디와의 학연을 강조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케네디는 '하버드 대통령'이다. 하버드대학교 출신 대통령이 6명이나 되지만, 하버드는 세계적인 공공정치대학원의 이름을 존 F. 케네디스쿨로 정하고 있다. 이 정도면 '우리 학교 선배님 다른 학교가 함부로 모셔가지 마라'고 널리 선포한 셈이다.

후버의 역사적 평가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스탠퍼드 지역에서 후버라는 이름은 허버트 후버보다 연구단체 후버연구소, 그리고 눈에 띄는 건물 후버타워를 의미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교내서점 구석에 후버코너가 마련된 것을 본 적은 있다.

후버에 비하면 우드로 윌슨은 모교인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오랜 세월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다. 그는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해 한국의 3.1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어서 한국인들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 /사진=미국 의회도서관.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 /사진=미국 의회도서관.

프린스턴 교정에서는 100여 년 전의 그가 상당히 훌륭한 대통령임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프린스턴 특유의 중세 유럽풍 성채들이 이어지다가 현대건물들이 나타나는 중심지역에 우드로 윌슨 스쿨이 큼직한 분수를 앞에 두고 세워져 있다. 우드로 윌슨 스쿨도 공공정책대학원으로 하버드의 존 F. 케네디스쿨과 같은 학문영역을 갖고 있다.

프린스턴은 특히 법대 의대 경영대가 없는 전통적 학풍이 강한 곳이어서 우드로 윌슨 스쿨의 교내 위상이 그만큼 더욱 커진다. 300년이 가까워지는 프린스턴의 역사에서 대통령은 윌슨과 제임스 매디슨 두 명이 나왔고 다른 한 명인 존 F. 케네디가 이곳을 다니다가 하버드로 편입해갔다.

이 학교 출신으로 총장도 지냈고 프린스턴이 있는 뉴저지 주지사를 지낸 윌슨은 오랜 세월 프린스턴대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처지가 크게 사나워졌다. 그가 생전 보여준 인종차별적 행적들이 당시 기준으로도 부당했다고 프린스턴대학교가 결론내린 것이다. 학교는 우드로 윌슨 스쿨의 명칭도 프린스턴 공공국제정책대학원으로 바꾸기로 했다.

경제난으로 인해 인기 없는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는 후버와 전혀 다른 사후 명성을 누리던 윌슨이다. 최근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를 뒤흔드는 인종차별 논란의 여파로 두 사람의 처지가 역전되는 모습이다. 후버는 여전히 인기 없는 대통령의 자리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높은 곳에 있던 윌슨의 처지가 급격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약간은 주목할 여지가 있는 곳은 프린스턴에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강의실이 있는 건물이 우드로 윌슨 스쿨이란 점이다. 모교 출신으로 업적을 세운 대통령에 대해 이런 잣대를 적용하는 학교가 한국의 4.19 혁명을 주목할 경우 어떻게 평가할지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자세 가운데 하나가 절제하는 것이다. 몇 몇 사람의 애절한 심정을 너무 강조하다가 보편적인 가치와 어긋날 경우 오히려 이것이 그 분에게 누가 되는 것이다. 윌슨의 현재 처지가 이런 교훈을 보여준다. 나만의 간절한 심정을 후세 사람이 두고두고 공유하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후세커녕 당장 5년, 10년 후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바뀔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우리 아버지 좋은 데 모시겠다는 효성 자체는 갸륵하다고 하겠지만 그로 인해 자식과 손자들이 험난한 일을 겪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음과 불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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