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만들던 시절 아버지들 모습이 어떻게 이사람에게서...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순철 SBS 스포츠 해설위원은 만필자보다 학년으로 3년이 더 위인 '작은 형' 급의 나이다.

그의 야구경기를 처음 본 것은 1980년 4월말 어느 날이다. 연중 고교 첫 대회인 대통령배의 4강 경기였다. 중앙중학교 3학년인 나는 중앙고등학교와 광주상고의 4강 경기에 단체응원을 갔다. 앞선 광주일고-충암고 경기는 선동열의 광주일고가 비교적 쉬운 승리를 거뒀지만 우리 학교는 1대2의 접전 끝 패배를 당했다.

그 때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오로지 "지축을 박차고 포효하거라" "계산 호랑이를 누가 당하랴"라며 응원가 힘차게 부르는데 몰입해 있었다. 홈런을 친 사람이 광주상고 김태업이란 사실만 기억하는 수준의 야구팬이었다.

이순철은 1985년 프로야구에 입단한 첫해 3할4리 타격으로 8위, 12홈런으로 10위, 31도루로 3위를 차지했다. 이런 맹활약으로 당연히 신인왕이 됐다. 그의 신인왕 경합은 당초 예상과 달리 맥 빠진 승부가 됐다.

이제는 같은 팀 동료지만, 고향에서의 라이벌 광주일고와 대학시절의 맞수 고려대를 나온 선동열과 투타를 나눠가진 경합이 예상됐었다. 그러나 선동열은 프로야구 계약과정에서 아마야구계와 마찰을 빚어 전기리그 출전을 못하고 데뷔를 후기리그로 늦춰야 했다. 선동열과 MBC청룡의 김용수, 롯데자이언츠 윤학길이 모두 이런 처지로 1985년 늦여름에 프로데뷔를 했다.

선동열이 반쪽 시즌만으로도 방어율 챔피언이 되긴 했지만 후기리그 초반 경험부족을 못 이겨 후기리그마저 삼성라이온즈의 우승, 그리고 그에 따른 한국시리즈 무산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순철의 등장은 점차 노령화되는 해태의 '김김김'라인에 새로운 보증수표가 됐고 과연 다음해부터 4년 연속 우승하는 왕조시대를 예고했다.

야구선수 출신 가수 김C는 예능프로그램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이순철을 꼽은 적이 있다. "타석에서 표정은 하기 싫은 표정인데 거기서 대단한 안타와 홈런이 나오는 점이 멋있다"고 그는 말했다. "하기 싫은"이란 표현은 팬으로 지켜본 그의 묘사일 뿐, 같은 화면을 지켜본 상대팀 팬들에게는 영화에서 무시무시한 악당이 농담을 써가며 위협을 하는 장면과 같은 것이었다.

선수 시절의 이순철. 그는 이 타석에서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결승타를 때렸다. /사진=광주MBC 유튜브 화면캡쳐.
선수 시절의 이순철. 그는 이 타석에서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결승타를 때렸다. /사진=광주MBC 유튜브 화면캡쳐.

신인왕을 차지한 다음해 이순철은 팀이 새로운 내야수 한대화를 영입한 바람에 3루에서 중견수로 위치를 바꿨다. 3할을 넘었던 그의 정확도가 2할 대 중반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홈런포는 건재했고 다리에는 더욱 스피드와 감각이 붙었다.

오래전에 타계한 해설계의 원로 이호헌 씨가 타석에 등장한 그를 보고 "이순철 선수는 홈런타자가 아니에요. 타격 폼을 줄여야 합니다"라고 지적을 하는데 그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이호헌 씨의 "저 홈런 치는 맛에 큰 스윙을 고집합니다"는 지적은 여전했다.

이순철의 타율이 1986년부터 내려간 것은 프로야구가 역대 최고의 '투고타저'시대를 맞았던 때문도 있을 것이다. 7팀 중 5팀이 1점대 원투펀치(한 팀은 0점대 1명 포함)를 갖춰 거의 모든 경기 '에이스 대결'이 펼쳐진 1986 시즌이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가장 흥미진진했다. 내가 응원하던 팀이 전후기 모두 가을야구에 실패했는데도 그렇다.

야구재능뿐만 아니라 매서운 승부사 기질을 과시하던 이순철이 어느덧 은퇴해 해설자가 됐다. 그동안 야구감독을 맡았다가 팬들의 많은 비난을 받았던 아쉬운 기간도 있었다.

한국의 청소년야구대표팀 경기를 이순철이 해설을 맡았다. 시청자들은 대표 팀의 한 선수에 대해 이순철 해설자가 유독 많은 지적을 한다고 느꼈다. 시청 소감에는 "저 선수 부모가 중계를 볼 텐데 참 섭섭하겠다고 생각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섭섭하게 느낄 것 같은 그 부모가 바로 해설자 이순철이었다. 그는 이날 경기에서 아들인 청소년대표 이성곤 선수에 대해 특히 많은 지적을 했다. 이것이 야구팬들에게 또 하나의 이순철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성곤은 2014년 프로야구 선수가 됐지만, 1군에 등장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그동안 병역을 경찰야구단 소속으로 마쳤다.

올해는 5월19일 첫 타석에 등장한 후 6월26일 롯데자이언츠를 상대하기 전날까지 21타수 8안타를 쳤다. 뭔가 될 듯도 싶은 가운데 상대 에이스 댄 스트레일리를 상대로 6회 균형을 깨는 홈런을 날렸다. 데뷔 6년만의 첫 홈런이었다. 이날 3타수 2안타 1홈런으로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다음날 4타수 3안타 1홈런을 기록했다.

이성곤이 첫 홈런을 치던 순간을 중계하던 허구연 MBC 스포츠 해설자는 "오늘 이순철 해설위원이 방송하고 있나요?"라고 말했다. 다른 방송국 얘기인 걸 따질 겨를도 없이 그는 바로 이순철을 떠올렸다고 자신의 유튜브채널에서 밝혔다. 허구연 위원은 "부모 마음에 몇 년 동안 누구 아들은 펄펄 나는 데 내 아들은 부진한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모두 같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구연 위원이 물어본 대로 그날 SBS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채널에 이순철 위원이 합류했다.

방송국은 굳이 감정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짓궂은 의도였는지 이런저런 뭉클한 장면을 내보내는 한 편에 이순철 위원의 표정을 담았다.

프로그램 내내 단 한번도 예외없이 "성곤이"라는 호칭 대신 "이성곤 선수"로 일관한 이순철 위원은 말투뿐만 아니라 표정까지 몇 년 전 그가 방송에서 했던 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성곤 선수는 경기에 출전하는 순간 내 아들이 아닙니다."

이순철 위원이 나이로는 만필자에게 '작은 형'에 해당하는 연배지만, 그가 보여주는 이 같은 '부주(父主)의 정'은 만필자의 아버지 세대들이 힘 주어 강조하던 그 무언가와 흡사하다.

자애를 절제하는 것을 아버지로서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하던 분들이다.

하지만 만필자가 솔직하게 평하자면, 우리 아버지들은 끝내 그런 모습을 일관하는데 많이 실패하셨다. 안쓰러움이 지나쳐 어느덧 앞뒤 안 가리고 따라다니는 아빠의 모습을 간간이 드러냈다. 아버지들은 "그런 몹쓸 자식은 내 손으로 죽여 버리는 게 마땅하다"는 입버릇을 갖고는 있었지만 절대 그런 실천을 할 분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말씀이 아마도 윗세대의 말투를 따라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물며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된 만필자의 동년배들은 오죽할 것인가.

야구해설자의 '부정(父情)' 역시 화면에 비친 것만 시청자에 대한 예의로 그리할 뿐, 실제로 집에서 어떠할지는 알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솟구쳐 올라올 감정을 눅자 치는 그의 힘이 들어간 눈초리는 우리가 나서 자라던 시절을 다시 꺼내 보여준다.

언젠가부터 형 같은 느낌의 아버지가 더 환영받는 듯한 세태변화가 있다. 솔직하게 자식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 뭐가 옳다고 간섭하기는 어렵다.

옛날 아버지들의 교육방식은 깨달음에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리는 건 사실이다. 이 교육의 핵심은 '자라서 내가 어른 되고 보니 그 말씀이셨구나'라는 것이어서 매뉴얼에 따라 몇 시간 이내 정답을 요구하는 요즘의 세상에서 지속되기가 참 어렵다.

이 가르침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제 슬슬 세상을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는 나이가 됐을 때부터다.

"아버지는 왜 닭다리를 안 드시고 몸통 살만 좋아하지?"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해 누구나 궁금했던 점이다. 집에 TV는 오로지 안방에 한 대 뿐. 가족이 앉아서 저녁밥 먹고 9시뉴스 볼 때까지 드라마면 드라마, 축구경기면 축구경기 식구들이 보는대로 내버려둘 뿐 아버지는 이 시간 무얼 보자는 말씀도 한 번 없었다.

성적표가 개판으로 나온 건 아버지 퇴근 전, 이미 엄마에 의해서 심판이 이뤄진 뒤다. 우리가 엄마의 눈초리를 의식해 자숙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었는?" 물어볼 뿐이었다.

1970년대 두 자릿수 경제성장, '한강의 기적'을 하던 시절의 한국 아버지들이 이랬다. 하나의 일에 지나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을 말로써가 아니라 체질화시켜주는 것이 이 자식의 생존력을 가장 높이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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