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완 전 통보관. /자료사진=뉴시스

 “기상 예보관치고 스트레스 때문에 살찐 사람이 없다”

과거 기상통보관으로 명성을 떨쳤던 김동완씨의 회고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그를 바라보는 감회가 새로웠다.
 
김동완 전 기상통보관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6일 오전 KBS TV ‘한국/한국인’ 프로에 출연해서다. 그는 과거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 줬던 기상 예보 방송의 이모저모를 낱낱이 소개했다. 하루하루 방송을 하면서 겪었던 고충과 보람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그는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에게 틀리지 않는 기상 예보를 할까하고 매일 고심했다고 했다. 한마디 한마디 쏟아낼 때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래서 개발해낸 멘트중 하나가 “오늘은 곳에 따라 비가오고 다른 지방은 대체로 흐리겠다”였다고 한다. 그는 이 예보만큼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킨 멘트도 드물었다고 했다. 비를 맞은 사람에게도 틀리지 않은 예보였고 비를 맞지 않은 사람에게도 맞는 예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기상 예보 방송에 대한 청취율(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기상 예보만큼 생활에 필요한 정보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특정 프로를 청취 또는 시청하다가 “다음은 기상예보를 전해 드리겠다”는 멘트만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청취자 또는 시청자가 많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가 청취자 또는 시청자를 잡아 놓기 위해 개발한 것이 생활기상정보였다고 한다. 그는 생활기상을 개발하느라 머리털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기상통보관 생활을 할 땐 두 명이 24시간 맞교대를 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루 24시간 근무하고 다음날 하루 종일 푹 쉬는 격일 근무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번날이면 택시운전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택시운전은 그에게 생활기상정보를 발굴, 개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손님들이 날씨 얘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 낚시를 갔는데 날씨 때문에 망쳤다는 얘기 등이 그것이다.
 
그는 손님들이 말한 날씨 얘기를 꼼꼼히 노트에 기록해 나갔다고 한다. 하루 20~30개씩 적었다고 했다. 1년이 지나니까 여러권의 책이 될 만큼 많은 분량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생활기상예보에 써먹었고 이것이 최초의 생활기상 예보였다고 한다. 오늘날 생활기상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또 이런 생활기상예보 덕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도 받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오늘은 불쾌지수가 매우 놓은 날입니다. 또 불쾌지수가 높은 날은 생각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남편이 집에 좀 늦게 들어가더라도 아내가 잘 봐줘야 합니다”는 식으로 멘트를 응용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나중에 한 남편이 김 통보관을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김 통보관 멘트 덕분에 집에 늦게 들어갔는데도 부부싸움을 면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김 전통보관은 그러면서 자기 전문분야가 아니더라도 각종 정보를 등한시해선 안된다고 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자기의 전문분야가 아니더라도 그쪽 지식을 충분히 섭취, 활용하면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했다. 자신이 택시운전을 하며 얻었던 각종 날씨정보를 생활기상 예보에 활용해 칭송을 받았듯이 말이다.
 
그는 예보방송 차별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많은 명성도 쌓을 수 있다고 했다. 특히 1974년 동양방송(동양TV)으로 자리를 옮겨 국내 기상예보사상 처음으로 기상도를 직접 그려가며 방송했고 그로인해 폭발적인 인기도 누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국내 생활기상의 선도자 김동완 전 기상통보관의 이날 회고는 앞으로 험난한 생활을 해가는 모든 사람에게 많은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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