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국정감사가 부활된 직후, 정치인 김대중의 모습을 상당히 인상적으로 소개한 신문기사가 있었다. 조선일보의 기자수첩이었다.

 
모 국가기관에 대해 의원들이 도청의혹을 제기하며 국정감사를 벌이고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직후로 국회의원들의 전문성은 지금과 비교하기도 어려울 때다.
 
전문기술과 관련된 내용이니 의원들의 지식 부족은 더욱 여실히 드러났다. 피감 기관 직원들은 의원들 질문에 비웃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분위기도 산만했다. 조선일보는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질의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고 전했다.
 
김 총재는 “도청을 하지 않았다니 본심은 믿겠다. 그런데 여기 도청에 시달리지 않은 사람 누가 있나. 의원들이 질문하는데 비웃기만 하고!” 제1야당 총재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은 기관장은 급히 잘못을 싹싹 빌고 다음부터 성실하게 국감에 임했다는 내용이다.
 
국회의원들의 본업이 이 세상 모든 일에 간섭하는 것이긴 한데, 특수한 직무만 수행하는 산하기관을 감사할 때는 정부 부처 감사 때보다 더욱 전문지식 부족에 시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흉볼 일이 아니다. 오히려 뉴스 타기 힘든 이런 곳에도 본분을 수행하는 것이니 격려를 좀 해줘도 될 일이다.
 
올해 모 정부 산하기관의 국정감사는 앞서의 조선일보 기사를 떠올리게 했다. 기관장 뒤를 가득 메운 간부들 상당수는 의원 질의 때마다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웃을 만한 때 웃는 거야 누가 간섭할 것이 아니지만, 자기네 수장이 대답도 제대로 못해 좌불안석하고 있는 상황에 웃고 앉아있는 것은 기관의 기강 문제도 연결된다.
 
피감 기관장 뿐만 아니라 간부들이 참석하는 이유는 기관장 한 사람이 모든 자료를 다 기억해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관장을 보조하라고 간부들이 참석하는 것이다. 방청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랫동안 업무를 해 온 간부들 귀에는 일 년에 한번 이것저것 쑤셔대는 의원들의 질문 내용이 자기 회사 신입사원만도 못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도 하나하나가 모두 국민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것들인데 어디서 감히 키득키득 거리고 있는가.
 
국회의원 중 한 사람도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기관장님은 한번 뒤를 돌아보시라. 혹시 색다른 분위기 못 느끼나”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 의원은 ‘남성 일색’을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한번 ‘뜨끔’함을 느낀 뒷 좌석 분위기는 이후 약간 달라지기는 했다.
 
뒷좌석 국장, 부장들 웃음의 이유가 의원들의 질문 내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이렇게 간부들이 킥킥거리고 있는 동안 이 사람들의 기관장은 의원들의 간단한 질문 하나도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기관장님은 기운 좀 내시라”는 핀잔까지 들었을까. 이 기관장은 때로는 답변이 궁해서 ‘웃음 가득’한 뒷줄 간부석을 쳐다보며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국회를 취재하면서 직원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인 기관은 기획재정부다. 온갖 질문에 ‘똑소리’나는 답변을 준비하는 광경을 보면 ‘이래서 모피아가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만큼은 국회 담당 서기관 한 사람이 중심이 돼서 마치 방직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의원 질문이 시작되면 이 서기관은 바로 질문의 요지를 예상해서 해당 국장에게 메모를 전달한다. 국장은 준비해 온 자료 중에서 관련된 내용을 간추려 메모에 덧붙인다.
 
이 메모는 의원의 질문이 끝날 무렵 이미 장관의 책상 앞에 전달된다. 여태 취재하는 과정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예전에는 재정경제부 부총리)이 답변할 때 뒤를 돌아본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장관 뿐만 아니라 참석한 모든 간부가 협력해서 답변을 준비하느라 긴장이 느슨해지는 법이 없으니 실없는 웃음 따위는 찾아볼 길이 없다.
 
국회에 자주 오는 정부 부처와 달리 일 년에 한 두 번 오는 산하기관이 모두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갖추고 오라는 얘기다.
 
예전 은행원 시절, 몇몇 국감을 수행한 선배들이 국회를 갔다 와서 “의원들 별거 아니더라” 큰소리치는 걸 본적 있다. 취재 기자가 돼서 보니 국감 현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다. 국감장 안에 들어올 직급에 크게 못 미쳤던 것이다.
 
무조건 정치인들이라면 얕잡아 봐야 본인이 우월해 보인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유권자라면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국회에 기관장을 수행해 출석한 시간에는 유권자가 아니라 국회의 감시대상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평소에 모든 업무를 아주 유능하게 처리했다면 무엇 때문에 해가 저물도록 국회에 잡혀 있느냐는 것이다.
 
더욱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별로 잘나지도 않은 얼굴에 헛된 웃음을 짓고 있는 시간에 당신의 기관장은 의원들의 유치한 질문 하나 제대로 대답 못해 혼비백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족: 올해 국감장 또 하나의 꼴불견은 경위에게 자신이 마신 물통을 치워달라고 요구한 모 기관 간부다. 명색이 국가기관인데 민의의 전당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 예의 교육도 없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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