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전만 해도 친구들 모임에서 정규재라는 사람을 아는 이는 나 혼자였다. 무슨 대화 중에 나는 친구들에게 아주 글을 잘 쓸 뿐만 아니라 지식이 해박한 언론인이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친구 모임의 절반 정도가 이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각종 토론회도 자주 나오고 논란이 되는 문제에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은 까닭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은 2000년 내가 금융전문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올 때 이미 글 잘 쓰는 선배기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2005년 한국투자공사(KIC) 설립에 관한 공청회 때는 패널로 참석해 아주 놀라운 식견을 과시했다. 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제대로 정보 공유를 하면 이런 기관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KIC가 수익률은 허름한 3.01%에 머물고 과거 메릴린치에 대한 잘못된 투자로 막대한 손실을 입힌 당사자를 고위 간부로 채용한 사실을 두고 국회의원들은 최종석 사장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답변도 제대로 못하고 뒷줄 간부석만 바라보는 최종석 사장의 모습에서 7년 전 KIC가 생기기도 전에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하던 정규재 위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국정감사 장소도 그 때 공청회가 열렸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실이었다.
 
30일 정규재 실장이 ‘다시 읽는 삼성전자 설립 반대 진정서’라는 칼럼을 썼다. 1969년 삼성전자 설립을 추진할 때 전자공업협회 59개 회원사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반대 사유에 대해 정 실장은 당시도 (시장은)만원인데 삼성 같은 ‘재벌’까지 전자회사를 만들어 좁은 시장에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냐는 내수 중소기업들의 항변이었다고 전했다. 이들의 주장은 의외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 실장은 오늘날 삼성전자가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현실을 전하며 당시의 반대 여론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려는 요지는 그 다음부터다. 최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골목 상권과 중소기업 영역으로 주제를 옮겨가고 있다.
 
“이런 착각은 장차 어떤 회사가 한국의 조리 두부를 세계인의 아침식사로 만들어 낸 다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 그때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한때는 두부가 중소기업 고유 업종에 속했다는 우스꽝스런 역사적 사실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만약 삼성이나 현대자동차가 두부 생산에 뛰어들더라도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삼성의 전자 진출과 재벌의 두부 생산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정 실장의 지적을 뼈에 새겨놓을 정도로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재벌 두부’가 1960년대 한국의 전자부문처럼 국가와 민간의 합동 장기 전략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겠다.
 
정 실장이 이날 칼럼 맨 하단에 썼듯, 삼성의 전자 진출은 당시 국가 차원의 미래 개척과도 관련돼 있다. 불모지에서 새로운 설계를 그려나가던 1960년대다.
 
혹시 두부가 예컨대 잘나가던 시절의 황우석 교수처럼 획기적인 유전공학 지식을 활용해서 인류의 모든 식량 걱정을 일소하는 첨단 식품으로 각광받는다면, 한국인들은 이 사업에 재벌들을 모시려고 애걸복걸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뉴스를 들은 바가 없다. 2010년대 재벌들이 골목상권에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는 이유는 이것만이 미래 한국이 살 길이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따님들이 살 길로 여긴 때문으로 보인다.
 
이병철 회장이 작고하면서 자신의 딸 앞으로 남겨준 기업이 신세계다. 오늘날 이마트 사업을 벌이고 있는 재벌이다. 그밖에도 빵집 음식점에 진출해서 논란을 벌이는 재벌들을 보면 대부분 회장의 딸이 벌인 일들이다.
 
주력 기업 아들한테 주고나면 딸들은 뭘 먹고 사나를 고민한 결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규재 실장의 이 칼럼 마지막 한 줄 만큼은 상당히 공감이 안가고 있다. 그는 “삼성전자 설립을 인가해줄 박정희가 지금 우리에겐 없다는 점이 실로 문제”라고 지적했다.
 
재벌회장들이 딸들 살림 밑천 만들어주는데 무슨 ‘박정희’가 필요하단 말인지... 지극한 정치의 계절이다보니 삼삼한 ‘떡밥’을 던져 준 것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나의 이같은 생각이 극히 편향적인 것인지 조심스러워서 또 하나 언론계 사표로 여기는 분의 글을 찾아봤다. 조선일보의 송희영 논설주간이다.
 
관련한 주제를 찾아가다 보니 올해 3월23일자 칼럼을 찾았다.
 
“골목 수퍼의 배달 아저씨가 재벌을 향해 쌍스러운 욕을 내뱉을 때 ‘우리 백성은 사촌이 땅 사는 것도 배 아파 못 견딘다’며 국민성을 탓했던 말도 지우고 싶을 것이다. 제빵 재벌에 밀려 오피스텔 코너의 빵집을 문닫은 ‘삼순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던 일도 당장 과거로 되돌리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올 것이 왔다’는 위기의식이 경제계 전체에 널리 퍼진 것은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창업자 총수들은 오늘처럼 오만하지 않았다.”
 
후생(後生)은 항상 앞선 분들의 지혜를 올바르게 받아들여 균형을 잡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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