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바쁘지도 않은 은퇴 후의 일상이지만 정기검진하면 우선 시간을 할애 하는 게 힘들고, 특히 내시경검사까지 하게 되면 검진받기가 더욱 힘들 뿐 아니라 거부감마저 드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2011년 들어 격년으로 받은 건강검진 결과 위내시경 및 조직검사에서 이형성 조직이 나타났고 재조사 결과도 미심쩍다며 검진기관에선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뢰서를 써주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나는 유독 먹고 마시는 문제에 약간 까다로운 편이다.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나 전라도에서 자라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두 곳 모두 음식문화가 매우 발달한 곳 아닌가. 특히 부모님이 일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탓인지 나 또한 어린 시절 ‘소바’를 많이 먹으며자랐다. 그래선지 누들 즉, 국수종류라면 비빔국수나 칼국수 짜장면 파스타
많은 사람들은 나를 호남사람으로 알고 있다. 전남 보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인근에서 고교까지 졸업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태어난 곳은 거기가 아니다. 이제 와서 밝히지만 나는 엄밀히 말하면 일본 태생이다. 나는 1941년 오사카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주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우리 가족은 1945년
학교를 마치고 시작한 공직자의 생활은 내게 평생의 직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때로는 밤늦도록 직장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 마치 그게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다. 고뇌도 많았지만 보람도 많았다. 때로는 과제에 매달려 해법을 찾아 고민도 하고 또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온갖 세상을 다 얻은
여기 내 사랑하는 가족과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생각나는 바를 두서 없이 적는다.나는 일제가 소위 대동아전쟁이라고 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신생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던 어려운 시절에 전라남도 보성 한 시골 농가에서 4남1녀 중 맏아들로 자라났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정미소를 운영한 탓에 별로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께
그냥 묻어두고 지나치려 했지만 그래도 밝히지 않고 가느니보단 이 기회에 알리고 가는 게 낫겠다 싶은 한 토막의 사건이 있다. 바로 대북 송금에 얽힌 치졸한 비화다. 내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2000년 6월 초 주중 어느 날로 기억된다. 이날 오후 잦은 회의와 결재시간을 틈내 뭔가를 구상하고 있던 때에 청와대비서실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1960년대 말 개발경제시절부터 2000년 초반 환란을 극복하기까지 30여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요철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때로는 일을 잘했다고 대통령의 칭찬도 듣고 훈장도 받으면서 즐거워도 했지만 어떤 때는 온갖 모함으로 좌천도 당해보고 심지어 영어의 몸이 되는 신세까지 겪어봤으니 그 회한 또한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깊은 상처가
제2대 금융감독위원회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이란 감투를 쓰고 대우사태며 현대문제며 금융노조파업에 이르기까지 온갖 궂은 일을 해결해가며 주마가편(走馬加鞭)을 하고 있을 무렵 내겐 느닷없는 ‘급정지’ 신호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었다. 2000년8월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명령은 명령인데. 비록 갑자기 내리라고 해서 내려
내가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 시절 공들였던 일 중의 하나가 우리 금융감독원의 수준을 선진국 감독기관 레벨로 끌어 올려 국제 기준에 부합토록 하는 것이었다.우리가 외환위기라는 특수 상황을 맞아 은행감독원과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그리고 신용관리기금 등 무려 4개나 되는 감독기관을 서둘러 묶어 통합금융감독원을 발족시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감독체계가 완
내가 금융감독위원회에 가서 한 일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통합 ‘금융감독원’ 설립 작업이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나는 신설조직을 만드는 덴 이력이 난 사람이다. 1966년 포병소위시절 사단 창설 작업에 참여했고 재무부 근무시절에도 신설된 과에 배치되어 일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1998년2월 내가 금융감독위원회에 발령받아가니 여기서도
외환위기이후 금융권은 크고 작은 파업의 연속이었다. 부실금융기관이 속속 퇴출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다가 5개 부실은행을 퇴출시키던 1998년엔 1차 금융노조 총파업이 있었고 2000년에 또다시 총파업의 먹구름이 금융권을 덮치고 있었다. 내가 2000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나니 이젠 금융지주사법 문제가 노사갈등의 핵심 현안으로 부각되
대우그룹에 이어 현대그룹에 대해서도 구조조정의 메스가 가해지면서 이제 금융시장에서도 크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대강의 시장 불안요인이 속속 제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금융감독 정책도 바꿔나가기로 했다. 새로운 구조조정을 하기보다 이제부터는 그간 수술대에 올려졌던 금융기관과 기업을 안정화 또는 정상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또한
기업구조조정만 놓고 보면 30대그룹과 대우그룹 문제가 어느정도 정리되면서 이젠 현대그룹이 도마위에 오를 차례였다. 대우에 이어 그다음으로 부채비율이 높은 현대그룹에 대해서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게 우리 금융감독위원회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그룹만 제외하면 기업구조조정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 상태였다. 1999년말 통계를 보면 국내 64개 구조조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내가 2000년1월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에 오르자 그야말로 가장 큰 문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대우그룹문제 였다. 500%가 훌쩍 넘는 부채비율도 문제였지만 더 이상 기다렸다간 이들 부실기업이 우리나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를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우채 환매문제로 금융시장은 일촉즉발의 붕
은행 구조조정 얘기는 이쯤 하고 다시 재벌 구조조정 얘기로 돌아가야겠다.다름아닌 5대그룹 구조조정과 관련해 워낙 큰 얘기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30대그룹 전반에 대해선 은행주도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조치해 놓은 만큼 금융감독위원회의 관심은 이제 5대그룹에 집중되고 있었다. 앞서도 거론했듯이 5대그룹중에서도 삼성만이 부채비율 200%아
30대그룹에 대한 구조조정의 가닥을 잡고 나니 이젠 금융권이 문제였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구조조정을 당할 차례가 된 것이다.금융기관, 특히 은행에 대한 구조조정은 자산 건전성을 기준으로 진행키로 방침이 정해졌다. 건전성이 취약한 은행에게 국가 금융시스템을 맡길 수 없었을 뿐 더러 부실한 은행들에게 기업구조조정을 책임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
내가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 임명장을 받은 것은 1998년3월14일이고 금감위가 현판식을 가진 것은 그해 4월1일이었지만 실제는 많은 멤버들이 그 이전부터 여의도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 빌딩에 모여 금감위 설립을 위한 사전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나 또한 임명장을 받기 한 달 전부터 여의도 팀에 합류해 금감위 설립 준비작업에 동참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1998년2월, 외환위기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됐을 무렵 나는 경기도 과천 재정경제부를 뒤로 하고 다시 미지의 근무처인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로 인생의 방향타를 틀어야 했다. 아직도 계절은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터라 여의도의 새벽바람은 여전히 매섭고 쌀쌀해 ‘마치 비바람 몰아치고 눈보라 치는 광야를 걸어가면서 풍운아가 된 듯한’ 내 마음을
1995년 ADB에 파견돼 97년말 재정경제원으로 복귀하기까지 ADB에서의 2년반 남짓한 생활은 겉으로만 보면 화려하고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이었다.직책을 이용해 세계 각국을 마음껏 여행할 수 있었고 필리핀 내에서의 삶도 고급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업무 또한 ADB내에서 한국의 위상이 작지 않았던 만큼 보람을 갖고 매사에 임할 수 있었다. 당시 ADB 고위층
ADB이사들에겐 컨설테이션트립 말고도 또 하나 피할 수 없는 여행이 있었다. 가기 싫어도 몇 달 만에 한번 씩은 꼭 떠나야만 하는 여행이 있었다. 바로 ‘재원보충여행’이 그것이었다.재원보충회의(Replenishment Meeting)를 위한 여행은 말 그대로 ADB가 빈국에 자금지원을 하는데 필요한 소요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재원보충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