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상훈 두산 베어스 코치는 1994년 LG 트윈스 우승 때 에이스였다. 1995년에는 20승도 올렸다.

그가 선수 시절 즐겨한 말은 “18.44미터를 던질 수 있는 한 선수로 남겠다”였다.

18.44미터는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거리다. 야구 경기를 TV로만 보면 짧아 보여도 위력 있는 공을 던지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다. 운동 좀 한 성인 남자도 훈련이 전혀 없다면 홈 플레이트도 가기 전에 땅에 떨어지기 십상이다. 생전 처음 마운드에 서 보면 포수는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앉아 있다.

올해 성대한 은퇴식을 가진 김응용 감독 같은 야구의 거장도 이런 공포를 갖고 있었다. 은퇴식 때 “왜 그렇게 시구를 빨리 했나”란 질문에 “명색이 선수 출신인데 원바운드 공이 될까봐 신경 쓰여서”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18.44미터가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물론 이상훈 코치가 은퇴한 이유는 18.44 미터를 못 던져서가 아니다. 김응용 감독의 은퇴 시구에서 보듯, 평생 전문 훈련을 받은 야구인들은 운동장에 설 수만 있다면 언제든 던질 수 있다. 이 코치의 은퇴는 본인 스스로 기준에 ‘제대로 된’ 공이 이제 아니란 판단이 더 컸을 것이다.

올해 프로야구에서는 위력 있는 시구를 던진 여성 연예인들이 팬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지금까지 여성 연예인들 중에 돋보이는 시구를 한 경우가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투수판에서 몇 걸음 앞으로 와서 던졌다.

그러나 올해는 거침없이 당연하다는 듯 성큼성큼 마운드로 올라서 꼿꼿하게 포수 미트로 꽂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지난 16일 프로야구 LG트윈스와 기아타이거즈 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선 그룹 에이핑크(Apink)의 윤보미는 날카롭게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유인구를 선보였다. 투스트라이크 이후라면 충분히 헛스윙을 유도할 만한 구위였다.

지켜보던 허구연 해설위원은 “왜 다른 여성 연예인들처럼 앞에서 던지지 않나 했는데, 여태 본 중 최고의 시구였다”고 격찬했다. 시타자로는 에이핑크 동료 오하영이 오른쪽 타석에 서 있었다.
 

▲ 윤보미의 시구가 날카롭게 스트라익존의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사진 하단에 가렸지만 윤보미는 투수판을 밟으면서 투구동작을 시작했다. /사진=MBC스포츠 화면캡쳐.

 

앞선 6월9일 SK와이번스와 NC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는 영화배우 박지아가 마치 선동열의 전성기 불펜에서 올라오는 듯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마운드에 섰다. 그는 거침없이 마운드의 투수판에 발을 올려 놓았다.

우완 박지아의 투구도 홈플레이트의 오른쪽 허공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윤보미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시구를 맞이하는 NC다이노스의 1번타자 박민우는 좌타자였던 것이다.

공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박민우는 헛스윙하는 예의를 갖추기 앞서서 우선 공부터 피하고 봐야 했다. 여자 연예인 공이라고 장난으로 맞아줘도 될 만한 그런 공이 아니었다.

박민우는 배터박스를 완전히 벗어나서야 헛스윙을 함으로써 시구자에 대한 도리를 다했다.
 

▲ 영화배우 박지아도 윤보미처럼 시구 때 투수판을 밟고 섰다. /사진=SPOTV 화면캡쳐.

 

▲ 박지아의 투구폼은 1988년 신인왕 이용철 해설위원으로부터 "선수 못지 않은 중심이동"이란 격찬을 받았다.


메이저리그에서 남성 힙합가수 50센트는 모처럼 시구로 나섰다가 엉뚱한 곳으로 공을 날리기도 했다. 그만큼 시구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프로야구 팬들은 여성연예인이 경기장에까지 나타나서 ‘예쁜 척’하는 것에 대해 평가가 후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야구인들의 세계에 야구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마음을 ‘개념 시구’로 보여줄 경우 아낌없는 격찬으로 화답한다. 당연히 이들의 호감도도 치솟는다.

‘개념 시구’에 담겨있는 팬들의 진심은, ‘다른 사람들의 영역을 존중하는 마음’을 고맙게 여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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