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키움증권 OOO입니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다시 이 인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전공을 살려 비서생활을 하다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 젊은 패기로 키움증권 고객만족지원센터 근무에 도전했었다. 처음 몇 개월 동안 힘든 교육기간이 이어졌다. 저녁 늦게까지 교육을 받고 아침 새벽 출근길 버스에 앉아 나도 모르게 졸다가 굴러 떨어진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굉장히 힘들고 서러운 시간들이었다.

그 땐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회사업무가 버겁게 느껴질 때, 진상고객이 불처럼 화를 낼 때, 체력적으로 한계가 올 때, 목이 하도 아파서 침을 넘기기 조차 어려울 때 등 이것 저것 고통스러웠던 일로 말하면야  고비가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오랜 시간 근무했고 업무가 익숙해지자 모든 일이 쉽게 느껴졌다.

고객이 “아그게, 저기요”라는 말만 들어도 어떤 업무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일에 능숙해지자 고객들과의 통화가 수월해졌다. 어느샌가 진상고객이 내 편이 되어 있으면 나도 모르게 희열을 느끼며 즐거워했고, 게시판에 칭찬글이 올라오기라도 하면 더욱 신나서 일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한번씩 찾아오는 ‘직장인 슬럼프’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한 가지 일에 매진하다가 갑자기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더이상 고객과의 통화가 즐겁지 않았고 짜증만 더해갔다. 예전같으면 별 일 아니라고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상황인데도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건가’하는 허무함에 휩싸였고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됐다. 처음에는 조금만 놀다가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중간 키움증권에선 다시 와서 일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 때는 어리석게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정말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나에게 소리치는 고객이 없어서 좋았고, 오랜만에 늦잠까지 잘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꿀맛같던 휴식이 내 인생에 큰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집이 한강 근처라 자전거 타는 것을 즐겼던 나는 비가 내리는 날에도 자전거를 끌고 나와 한참을 달린 뒤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가 내리던 어느날, 당산철교 밑 내리막길에서 오토바이 한대가 내 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고 나는 그걸 피하려다 그만 빗길에 미끄러져 크게 다치고 말았다. 결국 무릎에 금이 크게 가 통 깁스를 한 채 석 달을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석 달이 끝이 아니었다. 근육약화로 얇아진 내 다리는 재활운동이 필요했고 정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3개월이 더 걸렸다. 키움증권에서 처음 힘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서러웠다. 서럽고 무서운 나날이 계속됐다. 재활기간동안 ‘평생 못 걸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함께 아침에 눈을 떠도 딱히 ‘갈 곳이 없다’는 공포감에 마음은 더욱 약해졌다. ‘내가 다시 일을 할 수는 있을까,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할 걸...’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약 1년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쉬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OO증권에 입사하게 되었다. 회사 그룹은 컸지만 그에 비해 증권업무의 비중은 작았고, 고객수 또한  적었다. 고객센터 직원 수도 많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업무는 지점, 은행 등에 전화를 넘기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기계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모니터만 바라보다가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 회사의 업무는 중요도 측면에서 키움증권의 업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안았다. 그래서 난 다시 키움증권에 들어가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결심을 굳힌 후 무작정 키움증권 파트타이머로 들어가 주문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고향에 온 듯 편하고 익숙한 시스템에 나도 모르게 숨통이 트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키움증권의 업무가 매우 많은 것도 내겐 보람이었고, 내가 필요로 하는 조직이라는 생각에 더 열심히 일했다.

퇴사할 땐 일이 많아서 너무 힘들었는데 다시 돌아온 지금은 오히려 일이 넘치는 게  활력소가 된다. 내가 일하고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파트타이머로 일하는 동안 부러진 다리가 또 부러져 다시 깁스를 했었는데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목발을 짚고 다니며 열심히 일을 배워나갔다.

다행히 나를 믿어준 팀장님들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나는 다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 중요업무까지 맡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내게 ‘다시 돌아올 걸 왜 그만뒀냐’며 한심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뒤늦게나마 하고 싶고, 잘할 수 있고, 끝까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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