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한국사에서 가장 위엄 가득한 임금은 조선의 태종대왕이다. 엄청난 카리스마로 왕권을 강화한 덕택에 우리 민족사 3700여년 만에 드디어 민족의 문자를 완성하는 토대를 이룩했다.

왕업의 과정에서 두 명의 이복형제, 네 명의 처남, 매부 한 명, 사돈 한 명을 죽인 태종은 말 그대로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란 말이 딱 들어맞는 군주다. 임금과 함께 있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지금은 매우 인정 넘치는 왕이지만 언제든 무자비한 사람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태종의 위엄은 오늘날에도 전해져서 지금까지 무수한 사극에서도 세종성군의 부친이신 이 분을 가볍게 묘사하는 무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금기를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깨고 있다. 아역 남다름에 이어 유아인이 연기하고 있는 이방원은 9회가 진행되는 동안 벌써 세 차례나 신세경 등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팔뚝을 깨물리고 있다.

상천에서 대왕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나를 저렇게 묘사하는 수도 있구나”라고 여길 법 하다. 그동안 대왕은 조선왕조실록이 기초를 마련한 경직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드라마는 같은 작가의 앞선 작품 ‘뿌리 깊은 나무’의 시즌2나 ‘더 비기닝’에 해당한다. 지금의 이방원 유아인은 ‘뿌리깊은 나무’의 태상왕 백윤식이 된다.
 

▲ 2015년 '육룡이나르샤'의 이방원과 2011년 '뿌리깊은 나무'의 태종 이방원. /사진=SBS 홈페이지.

 

아주 어린 시청자들은 ‘꽃미남’ 유아인과 ‘멘토의 상징’ 백윤식이 잘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백윤식이야말로 1980년을 전후한 시절, 나르시스가 절로 떠오르는 꽃미남 중의 꽃미남이었다. 수년 전 화장품 광고에서 “우리 때는 조인성 얼굴은 미남 축에도 못 들었어”라고 얘기하는 장면도 있는데 올드팬들은 크게 수긍하는 말이다.

TBC가 KBS에 합쳐지기 전엔 연기자들이 전속 방송국에만 등장하던 시절인데, 백윤식은 KBS 소속이었다. 당시는 바로 ‘전설의 고향’ 오리지널이 인기를 끌 때다. 조선8도의 모든 처녀귀신들이 가장 애타게 노리는 것이 잘생긴 선비 백윤식이어서, 그는 거의 매주 귀신들에게 납치당했다.

백윤식 아저씨가 유아인의 노후 인물이 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육룡이...’에서 또 하나 급격히 변신한 인물이 있다.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다. 그 또한 실존인물로 정몽주를 암살한 사람이다. 드높은 선비정신의 상징 정몽주를 죽인 만큼 한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결사로 전해지고 있다.
 

▲ 태종 이방원의 측근 조영규의 변화 모습. 1997년 '용의 눈물'(왼쪽), 2014년 '정도전', 2015년 '육룡이 나르샤". /사진 = KBS, SBS 사진, CNTV 화면캡쳐.

 

1997년 ‘용의 눈물’에 등장한 조영규는 이런 이미지 그대로다. 사람 죽인 죄책감을 바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서 씻어 내릴 듯한 분장이다.

2014년 ‘정도전’에서 상당히 순화돼 지적인 듯한 모습도 가미됐고, 슬슬 주군인 이방원과는 농담도 주고받는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추호도 인정을 두지 않는 냉혈한의 모습은 여전하다.

그러더니 2015년 ‘육룡이...’에 이르러 애처롭고 눈물 나는, 약간은 ‘개그 캐릭’이 되고 말았다.

드라마가 끝나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보니 요즘 케이블에서는 유아인이 등장했던 많은 작품들이 방영중이다. JTBC의 ‘밀회’다.
 

▲ 대왕의 여인들(?). '육룡이 나르샤' 분이(신세경)와 '밀회' 오혜원(김희애). 오 선생님은 완력으로 옷을 벗기거나 팔뚝을 물어뜯지는 않았다. /사진=SBS, JTBC 홈페이지.

 

만약 ‘육룡이 나르샤’에 얼굴이 번쩍거리는 김희애가 투입된다면 작품 흐름이 어떻게 변할까. 지금껏 모든 사극들이 강조했던 태종대왕의 이미지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무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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