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발권력을 무제한 남발한 시기의 하나라면 중국 한나라 건국 초기를 들 수 있다. 한나라 3대 황제인 효문제까지는 민간에서도 구리만 있으면 마음대로 화폐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시대는 화폐가 물질로서 갖는 가치와 화폐의 액면 가치가 같았다. 그래서 구리만 있으면 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조폐 기술이 없는 시대이니 불가피한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1만원권, 5만원권 지폐는 그 자체로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옛날의 화폐는 구리가 필요할 때는 그 자리에서 녹여서 쓸 수 있는 광물자원이기도 했다. 한나라 건국 초기에는 사람들이 동전의 표면을 긁어서 필요한 구리를 구하기도 했다.

구리는 금은에 비해 흔한 편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널리 통용되는 화폐를 만들었다.

한나라 개국태조인 고조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영웅 군주이기는 하지만 통화금융 정책에는 영 소질이 형편없음을 드러냈다.

물자가 부족해 화폐 제조에 들어가는 구리를 탐을 냈다. 그래서 구리 함량을 12수에서 3수로 줄였다. 같은 구리로 4배의 화폐를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니 발권력의 남발에 해당한다.

기원전의 세계지만, 이런 발권력의 남용이 남긴 교훈은 오늘날 화폐금융론이 경고하는 그대로다. 그 시대사람 사마천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온다.

“법도를 준수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도모하는 돈 많은 장사꾼들은 돈을 엄청나게 끌어 모아 시장의 물건들을 사재었으니, 물가가 크게 뛰어 쌀 한 섬은 만전, 말 한 마리는 백 만전에 거래됐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만 없을 뿐, 남발된 통화 속에 거품 경제가 발생한 모습을 기원전 2세기의 사관이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돈만 발행해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경제구조가 단순한 고대 아시아 사회에서도 명백한 헛소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은 사람은 효문황제의 아들인 제4대 효경황제다. 민간의 화폐 제조를 금했다. 하지만 이런 근본 해답을 내놓기 전에 커다란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한나라 건국 초 최대 위기였던 오초7국의 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 오초 7국의 난을 다룬 중국드라마 '한무제'의 한 장면.


철기문화가 발달하고 행정력도 진보하자, 중국은 이제 제후들이 나누어 다스리는 봉건제가 아니라 중앙집권 통치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제후들은 자신들의 지방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효경제는 제후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영지를 조금씩 삭감해가면서 이들의 힘을 축소시켰다.

위기의식이 극에 달한 7국의 제후들은 오왕 유비를 중심으로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유비가 반란을 일으킨 배경에는 경제력에 대한 자신감이 존재한다. 유비의 영지에 막대한 동(銅)산이 있어서 유비는 마음껏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란을 진압한 후 효경제는 민간의 화폐 제조를 금지시켰다.

오초 7국의 난은 한나라 개국 50여년만에 겪은 대혼란이다. 흉노의 침략이 갈수록 거세지는 마당에 여기에 집중투입해야 할 군사력을 내란 평정에 동원해야 했다.

개국초 인플레이션과 오초7국의 난의 공통점은 발권력 남용과 관계됐다는 점이다. 화폐 발행의 공공적 특성에서 저렴한 비용의 이득을 취하려 무리를 하다가 크게 일을 그르친 경우다. 

2200년전 역사책에 기록된 일들인데, 오늘날의 현대 경제학의 원칙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는 이치가 참으로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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