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은 아베 최측근 나섰어도 '헬리콥터 머니' 무산시키는데...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무슨 일만 있으면 외국 누구하고 한국을 비교하면서 기사 쓰는 것이 그렇게 내키는 일은 아니다.

이런 부류의 글들은 읽다보면 한국의 현실을 지적하는 게 본심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외국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남보다 먼저 주워들은 티를 내는 호들갑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헬리콥터 머니’에 대해서는 염치 무릅쓰고 ‘비교질’ 좀 해야겠다. 이번엔 이걸 안하는 것이 기자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21일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헬리콥터 머니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임명권자인 아베 신조 총리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구로다 총재를 해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구로다 총재를 통해 일본은 헬리콥터 머니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그동안 일본의 정권 핵심부에서 관련 논의가 오간 과정을 보면 아베 총리가 일본은행 총재 해임과 같은 무리한 행위를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구로다 총재의 발언은 정권 수뇌부까지 모두 이해를 공유한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은행의 정책에 집권세력이 과도하게 간섭한다는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일본의 헬리콥터 머니 논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아베 총리의 경제측근인 혼다 에츠로 스위스 주재 일본대사가 나서서 중앙은행의 헬리콥터 머니를 이곳저곳에 들쑤시고 다닌 모습에서 ‘일본도 별 수 없구나’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혼다 대사는 자기 힘만으로 안되니까 외국의 저명인사인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까지 동원했다. 혼다 대사의 입김이 강하기는 했는지 그의 주선으로 버냉키 전 의장은 일본을 방문해 구로다 총재와 점심밥도 같이 먹고 다음날은 바로 아베 총리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중앙은행에 뭔가를 요구할 때 이렇게 버냉키 전 의장과 같은 해외 유력인사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다. 무슨 별관회의라는 자리에 중앙은행 총재를 오라가라하면 해결된다는 것이 정부 또는 정권의 인사들 사고방식이다. 중앙은행 총재가 어쩌다 이렇게 일개 장관 처신이나 하고 다니게 됐다.

혼다 대사는 앞서 아베 총리의 소비세 인상 연기를 재촉할 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을 동원해 성공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방법으로 헬리콥터 머니를 관철시키려 들었다.

그런데 중앙은행에 관한 문제는 소비세 인상과 차원이 달랐다. 최소한 일본의 경제시스템은 그런 덕목을 지키고 있음을 이번에 입증했다.

구로다 총재가 버냉키 전 의장과 오찬까지 했는데 그 내용을 일본은행이 전혀 밝히지 않는데서 뭔가 한국에서의 익숙한 모습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다음날 아베 총리와 버냉키 전 의장 만남에서는 배석자가 “헬리콥터 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고 전했다. 사전에 아예 헬리콥터 머니를 의제에서 제외한 인상이 강하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헬리콥터 머니를 추진중이라는 보도를 부인했다.

‘헬리콥터’파인 혼다 대사가 이곳저곳 쑤시고 다닌 덕택에 버냉키 전 의장이 아베 총리와 구로다 총재를 만나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베 총리 주변의 경제 참모들이 선을 넘어야 될 일과 넘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분명히 구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베노믹스의 핵심 설계자 혼다 대사라 해도 다른 참모들이 ‘헬리콥터 머니’만큼은 안된다고 선을 분명히 긋는 듯한 정황이 외신을 통해 계속 전해졌다.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는 최근 일본의 금융인들로부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아베노믹스’용 중앙은행 총재가 돼서 마이너스 금리까지 받아들인 나머지 은행원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고 있다. 시중은행이 자진해서 국채 프라이머리 딜러를 반납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구로다 총재도 버냉키 전 의장과의 오찬을 말 그대로 ‘밥만 먹고 헤어진 자리’로 돌려버리는 모습에서 전에 없던 약간의 ‘결기’도 느껴진다.

중앙은행 총재의 덕목이라면 ‘안되는 일은 절대 안 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경제 운전에서 마치 사이드 브레이크를 잡고 있는 운전강사와도 같은 역할이다. 나서서 신속하게 운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막는 최후의 방패다.

일본은 중앙은행의 이런 면모를 확인하면서 헬리콥터 머니를 없던 일로 돌려버렸다.

그런데 현재 헬리콥터에 올라탄 중앙은행 총재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헬리콥터 머니는 혼다 대사가 이번에 밝혔듯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하다.

정부가 쓰는 돈을 중앙은행이 바로 화폐를 찍어 제공하는 것이 헬리콥터다. 정부의 지출은 국민 모두가 돈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을 중앙은행이 해결해 준다면 논리적으로 중앙은행이 국민들에게 가가호호 돈을 나눠주는 셈이라는 뜻에서 공중에서 돈을 뿌리는 ‘헬리콥터 머니’라는 용어가 쓰이는 것이다.

한국의 구조조정 자본 확충 펀드가 바로 이런 헬리콥터 머니와 다를 바 없다. 정부가 11조원의 펀드를 조성한다지만 그 가운데 10조원을 한국은행이 조성한다. 한국은행이 돈 버는 기관이 아니니 10조원은 화폐를 발행하는 행위가 된다. 한은은 여기에 대해 미리 한도만 확보해 놓은 것이라고 기를 쓰고 변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헬리콥터에 대해서는 전혀 최첨단의 깔끔한 신식 헬기가 연상되지 않는다. 온갖 더러운 오물로 더럽혀진 비행체가 연상되고 있다.

정부가 어려운 국민 살림을 돕기 위해 지출을 늘리려는 것이 이번 헬리콥터의 목적이 아니다. 금융 엘리트를 자처하던 사람들이 국책은행을 거덜 냈기 때문에 그걸 메우려 뜨는 헬리콥터다. 분식회계를 저지른 자들이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이런 걸 치우기 위해 동원되는 헬리콥터다.

엉뚱한 자들이 배설한 오물 뒤치닥거리를 국민들이 하기 위해 뜨는 것이다. 일본에서 헬리콥터 머니를 논의한 것은 분식회계와 방만한 관리 끝에 거덜난 은행을 되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국책은행장을 지낸 사람은 부실기업에 수조원 추가 대출한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 무슨 별관 회의에서 강요받은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사람은 국제기구의 한국인 몫 부총재 자리까지 날아가게 만들었다.

정말 필요한 돈이라면 국채를 발행해야지 왜 발권력을 쓰느냐는 시비도 벌어지고 있다. 국채를 발행할 때 국회가 검증을 하고 그 과정에서 책임자들에 대한 준엄한 추궁이 벌어질 것을 피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도망가려 한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래저래 국민들에게 역겹기 이를 데 없는 헬리콥터가 지금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이 헬리콥터가 자신의 원칙에 어긋났음을 기자회견이나 국회 출석한 자리에서 거듭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뜻 헬멧을 쓰고 여기 올라탔다. 뭔가를 “적기에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그는 갖다 붙이고 있다.

일본은행의 구로다 총재는 버냉키 전 의장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에 대해 입을 꽉 다물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지난 11일의 일이다. 그 후 열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특별히 전하는 것이 없다. 21일에 이르러 그는 헬리콥터 머니를 안한다고 못 박았다. 107엔 위로 치솟던 엔화환율이 105엔대로 급락했다.

이주열 총재는 “재정이 나선다면 중앙은행이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다”면서도 “적기에” 헬리콥터에 슬쩍 올라탔다.

이번만큼은, 아무리 외국과 ‘비교질’하려 든다는 독자들의 지적이 있더라도, 한국은행과 일본은행을 비교 안할 수 없다.

아베 총리는 버냉키 전 의장은 만났어도 ‘헬리콥터 머니’라는 단어는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또한 한국과 비교돼서 눈길을 끈다. 최고 통치권자가 “한국형 양적완화가 참 좋은 방법”이란 말을 입에 담도록 이끄는 참모들은 어떤 교육과정을 받아온 사람들인지 개탄스러운 일이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국책은행 자본확충 펀드의 ‘총선용’ 표현이었다. 집권당 사람들이 쓴 용어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