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주한미군 철수' 카터 당선에 병나서 누운 기억이

▲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사진=뉴시스, 트위터.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초등학교 5학년 늦가을 어느 날이다. 날도 우중충한데 마음속은 더욱 쇳덩이처럼 짓눌려있었다. 그래서 그날 이런저런 일들이 지금도 잘 기억난다.

학교에서 교내 음악회가 열려서 학과 수업은 없던 날이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가는 길은 불안불안했다.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를 한 날이다. 대통령으로 유력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당선되면 주한미군을 전부 철수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니 지금 눈에 들어오는 서울 시내 산의 능선에 반공화보에서 많이 본 북한 군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상상됐다.

어린애가 무슨 애국자라고, 또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런 걱정을 했냐싶겠지만 그 해는 특히 살벌했다. 여름에 판문점에서 북한 군인들이 미군을 도끼로 살해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거기다 10월쯤에는 서울 시내에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민항기가 서울 시내로 잘못 들어온 바람에 밤새도록 서울 상공에 격렬한 대공포 사격이 벌어졌다.

그 때 나는 친구들과 골목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청운동 뒤편 엄청난 부자들의 저택 세 채만 있는 골목이었다. 우리들은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매일 축구를 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 댁의 어르신 회장님들은 자가용으로 퇴근하다 우리를 보면 “저 녀석들 또 와서 공차고 있네”라고 할 뿐이지 쫓아내라거나 하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축구공 야구공이 담장을 넘어가면 돌려달라고 이 댁 일꾼 아저씨들에게 조를 때만 좀 문제였다.

한참 뛰고 있는데 하늘에 빨간 별 세 개가 천천히 날아갔다. 무심하게 “저건 뭐지?”라며 생각해 봤는데 불꽃놀이라고 하기에는 날아가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조금 있다가 엄청난 ‘광광광광’하는 소리가 천지를 긁어댔다.

놀란 우리는 다급하게 부잣집들 대문의 지붕 아래로 몰려 들어갔다. 저편에 보이는 서산에 북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은 상상을 한 게 이때가 처음이다. ‘광광광광’ 소리는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 때 매우 현명하게 행동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 날의 대공포 사격으로 버스 승객 한 명이 사망했는데 떨어지는 유탄이 버스 지붕을 뚫었다는 얘기도 돌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본 꽤 잘 사는 집 친구 하나는 집의 옥상에 떨어진 탄알이 가득했다고 했다.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저녁밥을 먹는데 또 다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먼 하늘에 불꽃을 보니 아까 본 것보다 더욱 격렬한 불꽃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 미국 대통령 선거 날이 왔던 것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걱정이 가득하니 친구들하고 별로 떠들지도 않았다. 그러고선 집에 와서 마침내 열이 나고 뻗어 누워버렸다.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아버지도 카터 당선이 불안하기는 했겠지만 초등학교나 다니는 아들이 그 걱정으로 탈이 나는 모양이 매우 우스웠던 모양이다. 밤이 돼서야 정신 차린 나를 보고 “카터 됐다고 미군 다 나가는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며 웃으셨다.

아버지 말씀에 다시 용기가 나서 유난히 껍죽거리는 성격이 바로 다음날 되살아났다. 그해 겨울 나하고 이름이 같은 사람이 무임소장관인가 하는 자리에 임명된 걸로 한참동안 친구들한테 유세를 떨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 철수’는 절대로 그냥 사라질 이슈가 아니었다. 6학년 때는 미국의 존 싱글러브 장군이 미군 철수에 반발했다가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해임돼서 한국에서 영웅이 됐다.

나중에 듣기로 미군 철수가 최종적으로 철회된 것은 카터 집권 3년차인 1979년의 한국 방문 때라고 했다.

인권과 도덕성을 앞세운 지미 카터의 미국은 냉전의 패권 각축에서 전 세계 곳곳에서 소련과 제3세계 혁명세력에게 밀렸다. 쿠바는 더욱 강경한 소련의 맹방이 됐고 니카라과는 좌익 산디니스타의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소련이나 좌익과 무관하지만 이란에서는 회교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국왕이 쫓겨났다. 이런 국제정세가 미군 철수를 무산시킨 최대 이유였다.

올해 미국 대통령선거도 한국 사람들에게 상당히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방위비를 안내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는 한편 기존의 한미 자유무역협정도 파기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4년 전 선거에 나올 때도 “한국 등의 나라가 미국의 부를 가져간다”는 주장을 펼쳤었다.

블룸버그는 27일 기사에서 “트럼프가 당선돼 무역장벽이 생기면 한국과 필리핀이 최대 피해국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는데 외신마저 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 사회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트럼프의 등장에 미국의 지성사회가 크게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에 나서는 모습이다. 공화당 전당대회 효과로 트럼프의 지지율이 반짝하긴 했지만 오히려 안일하게 대응하던 지성사회가 자극받는 계기가 됐다.

미국과 유럽의 대중들이 기존 정치에서 벗어난 극우 고립주의적 정치세력에 크게 기우는 경향이 있지만 ‘지성의 선’을 벗어난 세력이 ‘선을 벗어나는 지위’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범사회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아직은 그렇다는 얘기다.

프랑스는 지난해 12월 지방선거에서 집권 사회당이 극우 국민전선의 승리를 막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오랜 라이벌인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2차 선거에서 일방적으로 사회당 후보들을 사퇴시킨 것이다. 사회당 공화당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공화당은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어떤 조치도 내놓지 않았다. 어떻든 덕택에 국민전선은 승리는커녕 13개 지역에서 한 곳도 승리하지 못했다. 1차 선거 압승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결과였다.

서구 지성사회가 아직은 작동하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다.

미국에서도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공화당 내부에서도 ‘선을 넘은’ 트럼프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경선과정에서 끝까지 경합을 펼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전당대회에서 트럼프 지지를 거부했다.

바다 건너 멀리 있는 남의 나라 일을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미국 사회 전체가 올해 11월만큼은 지성사회의 승리를 확인하는 자리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선거는 이번 한 번만이 아니다.

만약 앞으로 변형된 또 다른 ‘트럼프’가 등장하면 그 때는 어떨까. 히스패닉이나 회교도에 대해 무분별하고 몰상식한 발언을 뱉지 않는 또 다른 유력 극우파 정치인의 등장이다.

지금의 트럼프는 지성사회에게 주어진 너무나 쉬운 문제일 수 있다. 이마에 ‘악역’이라고 붙이고 다니는 드라마 캐릭터다. 이 정도 문제는 풀어낼 수 있나 한 번 던져진 사전 테스트일지도 모른다. 지성들이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다음은 더욱 난이도가 높은 문제에 처할 것이다.

새로 등장할 ‘트럼프’는 팀 케인 민주당 부통령 후보처럼 유창한 스페인어로 멕시칸계 유권자들의 감성을 공감하고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국과 중국에게 뺏기는 일자리를 여러분에게 돌려주겠다고 공언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변형된 ‘트럼프’는 지성의 기준으로 트집 잡기도 어렵다. 지금의 트럼프는 앞으로 등장할 ‘순한 맛 트럼프’를 예시하고 있어서 그것이 걱정거리일 수는 있다. 걱정이라기보다는 한국이 미국을 역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던지는 것이다.

트럼프가 하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으면, 미국의 패권 경계선을 알래스카에서 대한해협을 지나가는 선으로 옮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까지 미국인들이 지성을 걸고 비판하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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