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의 2010년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의 반짝거리는 츄리닝 비슷한 옷차림 또한 그의 금수저 특권을 상징한다. /사진=SBS 홈페이지.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정부 고위 관리가 “민중은 개돼지”이고 스스로 “상위 1%”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발언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파면됐다.

그가 말한 것처럼 상위 1%는 정말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있을까. 민중에 속하는 친구들 또한 개돼지로 보일까. 문제의 관리 또한 1%가 되려고 기를 썼던 사람이지 자신이 1%는 아니라고 말했다.

서울의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 중에는 같은 해 같은 학교를 졸업한 ‘물질적인 상위 1%’ 친구를 가진 사람이 꽤 많다. 학교에 따라서는 한 해 최소 한 명의 1%가 있는 곳도 있다. 요즘의 과학고나 외고가 아니어도 ‘과거 명문고’인 학교들이다.

정말 1%가 돼 볼 수는 없어서 이 사람들 진짜 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금수저 친구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는 있다.

부잣집 친구들이 사람 참 인정 많고 소탈하다는 얘기들은 금수저 아니라 누구라도 사람의 본성이 그러니 공감이 그다지 크게 가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의 본바탕은 아무 탈 없는 평상시가 아니라 시험받는 극한의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관중은 “곳간에 곡식이 넉넉하고 몸을 가릴 옷이 있어야 백성은 염치를 알고 예의를 지킨다”고 말했다. 형편이 넉넉하고 마음이 여유로울 때 인정을 보이는 것은 그 자체 훌륭한 것이긴 하지만, 기저의 본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몇몇 금수저들이 눈살 찌푸리게 하는 물의를 빚었을 때 그를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친구들이 “의외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다.

그렇다고 금수저 자제들이 서민들을 개돼지로 무시하는 본성을 지녔다고 단정도 못한다. 그렇게 심성이 잘못된 사람들은 부잣집 아들딸 아니라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어려운 처지에서 엄청나게 뼈를 깎는 노력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서 대중을 무시하는 성향을 더 쉽게 찾을 수도 있다.

부잣집 친구들에게서 상당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특징은 친해질수록 높아지는 의존심, 그리고 어느 순간에 확연하게 등장하는 경계심이다.

친해질수록 이렇게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세상 일을 잘 몰라서 그러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의존심은 얼마 후 경계심으로 돌변할 때 진정한 이유를 드러낸다.

경계심을 끄집어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돈 얘기를 꺼내는 것이다.

그 때 세상 물정 모르는 줄 알았던 이 부잣집 친구의 표정에는 엄청난 감정의 굴곡이 빠르게 지나간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허탈함이다.

‘너 마저도...’

지금까지 진정하게 속마음을 주고받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너 역시도 끝내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한 것이었구나라는 반응이다.

뒤따라오는 경계심은 오히려 부수적인 것이다. 허탈감이 이 친구 본연의 심정에서 비롯된 반응이다. 그동안 가문의 어른들이 사람 대하는 법을 가르칠 때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라며 반감을 가졌던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다. 경계심은 보이지 않는 집안의 매뉴얼이 작동하는 절차일 뿐이다.

앞서 보여줬던 의존감은 경계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대하는 감정체계였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 앞에 와서 돈 얘기하는데 이 친구만큼은 예외구나’ 할 때 보였던 모습이다.

인간은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돌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존재다. 정말로 ‘죽을 때까지 아쉬운 얘기 안할 친구’란 그 친구가 죽은 뒤에나 확인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부잣집 친구들의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속세를 완전 초월한 성인이 아닌 이상 친구를 두는 일에 아무런 사욕이 없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벗을 사귀는 이유가 그가 가진 지식일수도 있고, 그의 재담일 수도 있다.

인류 보편적으로 친구를 사귀는 가장 흔한 실용적 목적은 그 친구가 잘 싸워서다. 이런 친구는 내가 얼마나 친구들 가운데 왜소했는지를 잊게 만들기도 한다.

탁월한 인품 가진 친구만 만나려 한다면 인생 전체가 ‘템플 스테이’가 될 것이니 글을 쓰는 기자부터도 그리는 못 산다.

그러나 돈에 관한 목적만큼은 그 어떤 친구와의 사이에서든 남겨둬서 좋을 것이 하나 없다.

친분과 사업이 뒤섞인 결말이 사기사건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냉정하게 사업성을 따져야 할 자리에 진정한 친구들이나 누릴 수 있는 편의를 요구하는 그 자체부터 사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정말로 돈 얘기를 해야 한다면, 그 순간부로 차라리 절교를 선언하고 투자자와 투자처로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이 방법으로 어릴 때의 잔잔한 기억만큼은 상처를 안 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동창회에서 돈 얘기는 절대 금물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어쩌다가 정치하는 사람이 돼서 때만 되면 나타나 사돈의 팔촌까지 표를 모아 달라고 하는 친구도 골치 아픈데, 돈 얘기하는 친구의 폐해는 골치아픈 차원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다.

때마침 김영란 법으로 우리 사회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려 하고 있다. 부잣집 친구 뒀다고 맨날 10만원도 넘는 진미별식 얻어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이 친구한테 시장통 거친 음식도 대접하는 게 자연스런 친구간의 왕래다. 금수저로 태어난 것이 죄 아닌 죄라고 하지만, 오뎅 순대 사주는 친구를 둘 자격은 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내 돈으로 오뎅 순대 사 줄 거면 뭐 하러 부잣집 친구를 두나?”

친구를 만나는데 싸움을 잘하나 농담을 잘 하나는 따져도 부잣집 자식인지는 따지지 말라는 것인데 그 말을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다. 평생을 친구가 아닌 사업 파트너들 틈에서 살다 갈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도 상당수는 끝내 송사의 상대방이 되기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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