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유일호 부총리로서는 대단히 억울할 일이다.

싸움은 유 부총리가 먼저 건 것이 아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먼저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한은이 금리인하 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을 일이지, 왜 기획재정부의 재정정책을 하라 마라 언급하나.

점잖게만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애꿎은 사람 건드리지 말고, 할 거면 당신네나 하시오’라는 심정에서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그런데 저쪽에서 시비 걸어올 때는 가만있던 야당이 유 부총리의 반박에 대해서만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맹폭을 했다. 먼저 한 대 맞고 반격을 하려는데 “그만 싸워”라고 말리는 격이다.

한국은행 총재는 할 말 다하고 살면서 경제부총리는 한 마디 하면 안 되나.

경제부총리라고 입 닫고 살아야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로지 딱 하나 만큼은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바로 통화정책이고 금리다.

한은 총재는 재정정책을 마구 언급하는데, 부총리는 왜 통화정책을 입에 담으면 안되나.

이유는 분명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재정 정책을 입에 담았다고 해서 그것이 기획재정부의 재정 투입을 가져올 가능성은 0%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 부총리가 “금리가 좀 높아서...”라고 살짝 내비치기만 해도 이것이 금리 인하로 연결될 가능성은 대단히 높아진다.

이런 현실 때문에 경제부총리는 절대로 금리를 입 밖에 꺼내지 말아야 한다. 경제학의 원칙을 만든 대학자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한국은행 총재가 재정 투입을 주장했기 때문에 기재부가 마지못해 추경 편성을 하면서 기재부 차관이 “나는 여기에 반대 의사를 갖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 가능하고 실제로도 벌어졌다.

한국은행의 2004년 11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는 대단히 해괴한 기록이 남아있다. 금리 인하를 의결했는데 이성태 당시 부총재가 “반대한다”는 소수 의견을 남겼다. 한은 집행부서는 생각이 없었는데 금통위원들이 숫자의 우위로 금리 인하를 강요했던 것이다. 상당히 당황했을 박승 당시 총재도 반대 의견을 갖고 있었겠지만, 총재의 위치에서 차마 기록에 남기지 못해 부총재의 반대 표시로 정리된 상황이다.

한은 역사에 부총재가 소수의견을 남기는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이성태 부총재는 나중에 한국은행 총재가 됐기 때문에 그는 금통위 의사록에 소수의견을 남겨본 적이 있는 유일한 한은 총재이기도 하다.

한은으로서는 참으로 씻기 힘든 망신의 기록이다.

이 정도 ‘참사(?)’는 아니지만, 역대 최고 한국은행 총재로 평가받는 고 전철환 총재 때도 한 바탕 소동이 있었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리려고 한 2000년 9월, 관료출신 금통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를 이기지 못했다. 금리 인상에 관한 모든 보도자료가 폐기되고 급조된 “현 수준 유지” 발표문 한 장이 점심마저 거르며 진행된 금통위 회의 성명서로 배포됐었다.

그러나 이 때는 소동의 파장이 너무나 큰 나머지, 상당수 관료 출신 금통위원들이 이후 한은의 독립성을 수호하는 ‘매파’로 돌아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못 올렸던 금리는 바로 다음 달 인상했다.

금통위 회의에서 전해지는 이런 사례들은 한국의 중앙은행과 재무부처 간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 부총리로서는 ‘도발해 오는 상대(?)’로 인해 사기가 저하될 수 있는 기재부 부하직원들을 의식해 한 마디 반격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댓가가 너무 크다.

그동안 학식이 높은 부총리로서 지켜온 그의 풍모가 “척하면 척”한다던 전임자의 경박한 이미지로 추락해 버렸다.

대저 싸움이란, 항상 이기는 쪽이 관대함을 보여야 한다. 유 부총리와 이주열 총재는, 당사자들은 어찌 여길지 몰라도, 보는 사람 관점에서는 항상 이주열 총재가 맞고 돌아왔다.

지난 6월의 국책은행 자본확충 펀드가 대표적 사례다. 이주열 총재는 “한은이 아니라 재정이 떠맡는 게 맞다”는 소신을 여러 번 밝혔어도 끝내는 유 부총리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 하고 말았다.

이렇게 늘 맞고 돌아가는 상대에게 언제나 이기는 유 부총리가 말싸움은 좀 져주는 아량도 보여야 한다. 잘 참다가 한번 맞대꾸한 것이 하필이면 금통위 회의 직전이요, 또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받기 5일 전이니 이게 무슨 평지풍파인가.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기재부는 강자요, 한은은 약자인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제대로 된 시장경제를 하는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중앙은행과 재무부처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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