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들 앞세운 국정농단 없이도 사업 성공한 월나라 범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때로는 ‘왕(王)’만큼 중요한 사람이 ‘킹 메이커’라고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을 가능성 하나를 보고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무수한 죽음의 고비를 대신 넘기기도 했다. 모신 주군(主君)이 마침내 왕이 돼서 이것을 기억 못할 리 없다. 고생은 끝났고 이제 부귀영화를 누릴 일 뿐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수많은 등극의 공신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병상에 누워서 천수를 다한 킹 메이커의 비율은 많이 쳐봐야 20%가 안 되는 것 같다.

일부는 죄가 없는데도 놔두면 위험해서라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과거 공을 내세워 진짜로 간신이 돼 발호하다가 처형당했다.

간신의 대명사가 된 조고는 원래 목숨 걸고 진시황제를 자객인 형가로부터 구한 충신이다. 이 공으로 인해 시황제의 총신이 됐지만, 무소불위 권력을 갖게 된 그는 오히려 시황제의 아들인 2세 호해황제를 시해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이란 것은 참으로 위험한 속성을 함께 지녔다. 목숨을 함께 한 동지 사이에 이것이 끼어들면, 서로의 옛 기억은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핑계로 전락한다.

역사에서 수도 없이 반복된 사례지만, 때가 되면 대부분 공신들은 또 다시 이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혹자는 주군의 주위에 ‘인(人)의 장막’을 치며 국정을 농단하다가, 혹자는 끝없는 재물을 탐하다 비극을 맞았다.

그런데 극히 예외적으로 주인을 섬겨 대성공을 이루고, 자신 또한 엄청난 재력을 갖게 된 인물이 있다. 춘추시대 월나라의 범려(范蠡)다.

▲ 월나라 구천을 도와 패업을 일으킨 범려. /사진=중국 위키백과 퍼블릭도메인.

춘추시대가 전국시대로 전환되기 직전, 오나라와 월나라의 각축으로 유명한 시기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오왕 부차의 참모인 오자서와 군사적 지략 대결을 펼친 사람이다.

구천이 부차에게 패해 오나라에 가서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구천의 곁을 지켰다. 구천은 부차의 인분까지 먹어가며 충성심을 가장해 석방될 수 있었다.

월나라에 돌아온 구천은 볼모 시절의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해 곰쓸개를 핥으며 그 쓴 맛을 매일 되새겼다. 이것이 바로 상담(嘗膽)이다. 예전에 오왕 부차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잤다는 것과 합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가 돼서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마침내 구천의 복수가 성공해 오나라는 패망했고 구천은 중원제후들에게도 패왕(霸王)의 위엄을 떨치게 됐다.

구천은 범려에게 “월나라를 둘로 나누어 그대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범려는 “이전에 왕께서 모욕을 당하도록 만든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고 오히려 월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떠나는 범려의 솔직한 생각은 다른 공신인 문종과의 대화에 담겨 있다.

범려는 문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거두어지는 것이고, 교활한 토끼가 모두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 월왕은 목이 길고 입은 새처럼 뾰족하니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소. 그대 또한 월나라를 떠나오”라고 충고했다.

범려는 구천이 나라 절반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공신들을 박해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범려의 충고를 듣지않은 문종은 끝내 구천의 명령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범려는 간단한 보물만 챙겨 식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제나라로 떠났다. 해변에서 아들과 고생스럽게 농사를 지었는데, 이걸로 제법 큰 재산을 모았다. 그의 성공이 제나라에서 명성을 떨치자 재상의 지위를 얻게 됐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않아 이 또한 부담을 느꼈다. 재상의 인장을 반납하고 모은 재산을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귀중한 보물만 챙겨 도(陶)라는 곳으로 떠났다. 이후 그는 자신을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칭했다.

도에서는 농사 뿐만 아니라 유통물류사업도 벌였다. 물건을 사서 쌓아놓았다가 이 물건이 필요해질 때 1할의 이윤을 남기면서 되팔았다.

사마천은 경제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로 모아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지었다.

사마천은 여기서 도주공 범려에 대해 “생업에 종사하여 물건을 사서 쟁여두고, 때에 맞추어 물건을 팔아넘겼지, 사람의 노력으로 경영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무조건 노동력만 투입한 것이 아니라 마케팅 등 경영기법을 구사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범려는 오늘날 미국의 갑부들처럼 자선과 봉사를 함께 해야 부를 유지할 수 있음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19년간 세 차례에 걸쳐 천금의 재산을 모았는데 두 번은 가난한 친구들과 고향의 형제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두 나라에서 재상의 지위를 누렸지만, 나중에 사업을 벌일 때는 이때의 인맥이나 영향력을 전혀 동원하지 않았다. 살던 곳을 등지고 이름마저 바꿨으니 애초부터 정부의 장관을 동원하는 따위 국정농단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범려였지만, 한 가지 너무나 큰 인생의 실패를 겪고 말았다.

초나라에서 둘째아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막대한 재력으로도 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경제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초나라 정치에 돈의 힘이 파고들 빈틈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실패 원인은 둘째 아들을 구하는 일에 막내아들을 보내려던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못하고 큰아들을 보낸 때문이다. 막내 대신 자기가 가겠다고 고집했던 큰아들은 동생을 구하기 일보직전 황금을 아꼈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큰아들이 돌아왔을 때 모든 가족이 슬퍼했지만, 범려는 쓴웃음만 짓고 아들의 시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범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큰 애가 동생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돈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큰 애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했고 살기 위해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막내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부유한 것을 보았고 좋은 마차와 말을 타고 다니며 사냥이나 하고 다녔으니 돈이 어떻게 생기는 줄도 모른다. 돈을 쓰고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막내를 보내려고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범려는 난세의 공신으로 주군을 왕으로 만들었다. 주군이 난세를 평정하자 그는 정치를 치세의 인물들에게 맡기고 정치일선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어린 아들과 함께 고난을 마다않고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이뤘다. 이렇게 쌓은 부를 수시로 이웃들에게 베풀면서 그의 가문은 대대로 부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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