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아프리카 물소는 초식동물이지만 사자를 공격해서 죽이기도 하는 무서운 동물이다. 그러나 이미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상태에서는 식욕에 가득찬 하이에나 무리를 물리칠 수 없다. 이 물소는 끝내 하이에나들에게 희생됐다. /사진=남아프리카공화국 크루거국립공원 유투브 동영상 화면캡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4] 저쪽 팀에 시속 16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가 있다. 직구가 워낙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그는 변화구를 던지는 법도 없다.

체력마저 좋아 마운드에 그제도 오르고 어제도 올랐다. 보나마나 오늘도 또 오를 것이다.

그의 강속구에 속수무책으로 물러나는 타자들을 보면서도 감독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무쇠가 아닌 이상 언젠가는 몸 상태가 결딴난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등판했다. 경기에 앞서 타자들에게 강속구에 대처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연습투구를 던지는 투수는 마운드에서 몇 걸음 앞에 나와 공을 던져 타자들이 강속구 타이밍을 찾도록 도왔다.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의 손을 떠난 공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왔다. 강속구만 예상했던 타자들은 공의 위치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공도 들어오기 전에 휘두르다 삼진을 먹는 타자도 속출했다. 오늘도 또 졌다.

그러나 감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경기장을 떠났다. 천하무적의 직구를 가졌는데 갑자기 변화구를 던져댄 까닭이 무엇이겠나. 안하던 짓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드디어 투수의 몸에 이상이 온 것이다. 오늘도 졌지만 내일부터는 다를 것이다.

1997년 한국의 외환당국을 잔뜩 지켜본 자들 가운데는 국제 투기세력들도 섞여 있었다. 구체적으로 누가 들여다봤다고는 얘기할 수 없지만, 상식적으로 이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투기세력이 아닌 정상적인 투자자들도 저렇게 매일 외환시장 개입을 해서는 외환보유액이 견디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당국자들이 “아무 문제없다”고 하는 말은 어제도 오늘도 개입이 나올 당시에만 약간 먹히는 정도였다.

혹사당하고 있는 투수처럼 한국의 외환당국은 조만간 가진 달러가 없어서 시장개입을 하기 어려울 것이란 의구심을 사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시켜준 것이 1997년 2월11일이다. 이 날짜는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해서 확인한 것이다.

이날 한국의 외환당국은 ‘선물환 개입’이란 것을 단행했다. 3개월 후의 달러 선물환을 사들이면서 달러 현물환을 팔았다. 변칙적인 시장개입이었다.

지금까지는 현물환을 파는 ‘직구’형 개입을 했다. 그런데 이제 현물환은 오히려 사는 대신 선물환을 판 것이다. 이런 개입을 하는 이유는 딜러들이 자발적으로 현물환 달러를 팔게 만든다는 데 있다.

선물환 가격을 떨어뜨리니 딜러들로서는 지금 현물환을 팔고 선물환을 사면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럴듯한 방법처럼 보여서 당국이 이런 개입을 선보인 즉시로는 약간 환율 상승세를 가라앉히는 듯도 했다. 하지만 이날 역시 환율은 0.6원 올라 869.2원에 마감됐다.

그러나 환율 상승을 얼마나 막았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외환당국이 이런 방법을 쓴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중의 실수였다.

외환보유액이 바닥나고 있음을 전 세계에 대고 알린 것과 마찬가지가 됐다. 투기세력들은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 한국의 당국이 무방비상태가 됐다는 자백을 받아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마치 하이에나가 가득한 아프리카 초원을 일부러 피 냄새를 풍기면서 지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보 부도는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집중되면서 벌어진 일이지만, 외환시장에서의 이런 실수는 아는 사람만 알고 지나가는 일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 개입에 대해 “기업들이 선물환을 사도록 유도함으로써... 어느 정도 효과를 거뒀다는 분석”이라고 나름 호평했다.

이 글을 쓰는 내가 결과론을 들어 이런 언론 보도를 탓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그 때는 언론인이 아니었지만 나 또한 내가 쓰는 원달러 일기에서 선물환 개입을 ‘절묘한 변화구’라고 칭찬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국민들은 내 나라 곳간이 이제 모든 투기세력들이 노리는 표적이 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나갔다.

다음날에는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중국 베이징의 한국 총영사관으로 망명했다. 국민들의 관심이 노동법과 한보를 잠시 떠나게 됐다. 온갖 악재만 생산하고 있는 집권세력으로서는 간만에 호재를 만난 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국제 금융시장의 투기세력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들에게는, 한국에서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헛발질’ 선물환 개입이 더 귀중한 뉴스였다.

한 달 쯤 후에는 온갖 코메디 소재가 쏟아져 나온 한보 청문회가 열렸다. 황장엽 뉴스로 모든 것을 덮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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