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시위대가 지금 유일하게 '대한민국' 브랜드를 지켜주고 있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00만 명의 대규모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는데도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는 평화시위를 벌인 것이 놀라운 시민의식의 표현으로 격찬받고 있다.

하지만, 민주 사회가 그렇듯 모든 사람이 칭찬 일색인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어떻든 나쁜 모습만 들추려고 하는 사람들은 논외로 쳐도 여전히 일부 비판이 존재한다.

특히 청와대를 중심으로 하야 요구를 묵살하고 국정운영을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이제 평화시위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애초부터 “평화적 시위라는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다.

▲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던 12일 시위가 끝난 후 남아있는 시민들이 광화문 도로를 청소하고 있다. /사진=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지난 12일 100만 명이 집결한 경복궁~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서울 복판은 예전 시위 현장과는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이리저리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떤 사람들은 서너 명 일행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근처 포장마차는 동참하러 나왔다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의식 없이 그냥 나온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땅 위에서는 이렇게 산책나온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콩나물시루처럼 꽉 들어찬 지하철 공간에서 한참을 꼼짝 못하고 서 있다가 지상으로 나왔다. 장시간 숨 막히는 공간에 있으면서도 한 발자국씩 빠져나갈 때까지 참고 나온 사람들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30만 시민이 모여서 반대한 2004년 시위 현장만 해도 “선봉에 서서 하늘을 본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과 같은 예전 1980년대 운동가요를 함께 부르며 기세를 높이던 시민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노래를 알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을 젊은 세대와 시위라면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성향의 사람들도 대거 동참하고 있다.

예전같이 함께 투쟁가요를 부르는 자리가 되면 오히려 다른 장소로 발길을 돌린다는 것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다. 당시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5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허전한 현장이기도 하다.

격앙된 것보다 가벼운 듯한 이런 분위기는 그나마 지금의 상황에서 국가 경제에도 여러 모로 도움이 된다. ‘지정학적 불안’을 디폴트로 항상 갖고 있는 한국 경제에 이미 해운·조선 사태가 겹쳐 있다.

정치상황 때문에 어느새 뉴스에서 까맣게 멀어지고 있는 해운·조선 사태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19년 전 ‘IMF 위기’와 같다는 경고가 나왔던 문제다. 여태 전혀 해결된 것이 없다. 이 문제에 관련된 사람들이 지금의 정치위기와도 상당 부분 겹치고 있다.

온갖 위기가 잔뜩 겹친 한국 경제에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 시위나온 사람들의 ‘가볍고 밝은 표정’인 것이다. 이들의 얼굴에서 희망을 확인한 금융시장에는 아직 ‘패닉’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금의 평화시위는 또 하나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측면을 갖고 있다.

엄마 아버지가 1980년 ‘서울의 봄’ 때 갓 태어났을 정도의 어린 학생들에게서조차 그 시대 교훈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의 평화시위는 시민사회의 역사적 교훈을 반영하고 있다. 시위하는 사람들부터 ‘행여 빌미를 주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배들의 교훈을 두고두고 대물림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시위 직후 깨끗해진 세종로와 광화문 광장을 보면서 놀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젊은 대학생들이 시내를 가득 메웠다가 몇몇 불상사가 신군부에게 빌미를 주고 말았다. 1주일도 안돼 계엄령 확대로 국회가 해산되고 그 다음날부터는 광주에서 살육이 시작됐던 비극의 교훈이 지금도 시민들의 의식구조에 DNA 구조화돼서 남아있다.

36년 전의 일을 역사책에서만 어렴풋이 봤을 어린 학생들이 이런 시민 DNA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정말 대견하면서도 존경스러운 일이다.

영웅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오는 법이라는데, 유감스럽게도 정치권에서는 이런 인물이 아직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헛발질 하는 사람만 보일 뿐이다.

난세의 영웅으로 등장한 건, 상식을 초월한 경이로움을 보여주고 있는 시민사회 전체다.

19년 전, 국가부도의 위기를 돌파하게 해준 ‘금 모으기’의 저력과 같은 시민의식이다. 함부로 폄하해서도 안되고, 쉽게 포기해서도 안되는 민족의 엄청난 자산이다.

진정으로 충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앞장서 격앙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에서 돌발행위 하는 사람의 의도를 의심하고 이런 자들이 발도 못 붙이게 밝은 분위기로 압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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