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에서 배우는 경영 통찰력<시리즈 36>...일본 철도 광고의 교훈

▲ 김병희 교수

[외부 기고=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PR학회 제15대 회장]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참 많다. 바쁘니까. 빨리빨리 끝마쳐야 하니까.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까.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 이런 광고 카피도 있었지만, 어떻게 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쁘니까 애들 데리고 당신이나 다녀와요.” 이렇게 말하는 경영자도 많으리라. 경영자들은 바쁘다는 이유를 가장 많이 댄다. 하지만 돌아가는 물레방아 속에도 손 들이밀 틈은 있다고, 잠깐씩 짬을 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훌쩍 떠나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떠나지 못한다. 앞만 보고 빨리빨리 달려온 우리들, 여행을 통해 인생의 방향은 물론 경영의 방향 감각도 되찾을 수 있을 터. 일본의 철도 광고에서 천천히 가는 여행의 가치를 느껴보자.

▲ JR 광고 '청춘18 티켓' 시리즈 /사진=김병희 교수

JR히가시니혼(JR東日本) 철도의 광고 캠페인 ‘청춘18 티켓’ 시리즈는 천천히 가는 여행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 “청춘18 티켓(靑春18きっぷ)”이라는 철도 패스를 알리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집행한 각 광고의 카피를 순서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고교생인 내가 내렸다.” (1998)
  “벌써 사흘 동안 TV를 보지 않았다.” (1998)
  “아아, 여기다, 싶은 역이 분명히 있다.” (1999)
  “학교를 졸업하면, 봄은 소리 없이 가버리게 된다.” (1999)
  “여름 방학에는, 늦잠이 가장 아깝다.” (2001)
  “왜 일까. 눈물이 나왔다.” (2001)

  JR히가시니혼은 일본 국유 철도가 1987년 4월 1일에 민영화됨으로써 발족한 7개의 주식회사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청춘18 티켓은 신칸센(新幹線) 이외의 모든 완행열차(일부 쾌속열차 포함)를 금액과 구역 또는 횟수에 관계없이 5일 동안 마음껏 승하차할 수 있는 일본에서 가장 저렴한 철도 패스다. 일정 기간에만 이용할 수 있는 제약도 있지만 가장 저렴하게 일본 전국을 여행할 수 있다. 티켓 명칭에 숫자 18이 들어있어 있다고 해서 18세 이하만 가능한 게 아니라 국적과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청춘18 티켓’ 시리즈 광고에서는 일본 전역을 무대로 달리는 열차를 소재로 삼아 천천히 가는 여행의 의미를 감성적인 카피로 담아냈다. 여행을 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자는 메시지가 철도가 달리는 장면과 어울리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상품 정보를 감성적이고 시적으로 표현하는 정서형 헤드라인을 써서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 정서형 헤드라인은 자칫하면 시적 표현에 빠져 상품과의 상관성을 놓칠 가능성이 많은데, 이 광고에서는 ‘청춘18 티켓’의 혜택을 여행의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호평을 받았던 광고들을 조금 더 살펴보자.

▲ JR 광고 '청춘18 티켓' 시리즈 /사진=김병희 교수

  “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도 소중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분에게.” (2000)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2002)
  “자신의 방에서, 인생 같은 걸 생각할 수 있을까?” (2002)
  “여행의 즐거움(E)은 거리(km)의 제곱에 비례한다.” (2003)
  “여행은 새하얀 도화지다.” (2005)
  “천천히 가기에 보이는 것.” (2008)

이밖에도 주옥같은 카피들이 많다. 20여 년 동안 수십 편의 광고가 나왔지만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배경 사진과 카피만 봐도 훌쩍 떠나고 싶다. 마음을 울리는 카피 하나하나에 천천히 가는 여행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캠페인을 진행한 결과, JR히가시니혼의 브랜드 선호도가 해마다 2-3%씩 신장되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철도를 더 자주 이용했고, 낡은 교통수단에서 인간미가 넘치는 따뜻한 철도로 브랜드 이미지도 바뀌었다. 청춘18 티켓은 학생들과 배낭 여행족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여러 광고들은 전일본광고협회(ACC)의 주요 광고상을 휩쓸었으며,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국민광고’로 자리 잡았다.

“이 여행이 지금의 나다”, “천천히 가기에 들려오는 것”, “천천히 가기에 만날 수 있는 것”, “변하는 일본의, 변하지 않는 경치. 천천히 밖에 갈 수 없는 여행을 한다.” 이처럼 여러 광고에서는 천천히 가는 여행의 묘미를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출장길에 비행기를 주로 이용할 터. 앞으로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어느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철도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처럼,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지 확인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철도 여행을 하면서 경영전략의 타당한 방향도 점검해 볼 수 있으리라.

한 사람의 일생이나 회사 경영에서도 방향의 옳고 그름이 먼저이고, 속도를 더 내거나 늦추는 일은 그 다음 문제다. 늘 바쁘게 살아가며 성과의 속도를 중시하는 경영자들이라면 더더욱 천천히 가는 여행을 해봐야 한다. 모두들, 잠시 일손을 놓고 떠나자. 천천히 가는 여행을 통해 속도 조절의 지혜도 얻었으면 싶다. 느린 여행은 인생을 매만져 준다. 천천히 가는 여행을 하다보면 시나브로 인생의 맵시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다른 내가 되어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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