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업인의 트레킹 이야기<32>...이곳은 통일신라 때부터 물류 중심지 역할

▲ 박성기 대표

[초이스경제 외부 기고=박성기 도보여행가, 도서출판 깊은샘 대표] 계절은 이미 봄의 속을 파고든다. 나들이 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번엔 필자가 최근 가본 곳 중 봄나들이 하기 좋은 곳을 추천하려 한다. 오늘은 2018년 2월 17일 토요일에 걸었던 코스를 소개한다.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원주의 대표적 폐사지廢寺址)인 흥법사지(興法寺址)와 법천사지(法泉寺址), 그리고 거돈사지(居頓寺址)가 그곳이다.

원주는 통일신라시대 9주 5소경 중 하나인 북원경(北原京)으로 영서지방의 행정과 물류, 경제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배경으로 문물이 융성하고 경제적 여건이 양호한 이곳에 신라 말에서 고려에 걸쳐 거대한 사찰이 들어서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북상하는 길에 있었기에 유난히 이 지역의 절들이 많이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하면서 길을 나섰다.

▲ 보물 463호인 흥국사진공대사탑비. 비신은 조각난채 경복궁에 보관되어있다. /사진=박성기 대표
▲ 이수에 새겨진 眞空大師(진공대사) 글귀. /사진=박성기 대표
▲ 흥국사 삼층석탑 /사진=박성기 대표

아침 나서는 길 날씨가 차서 손이 시리다. 아직 아침기온이 매섭지만 봄기운은 벌써 완연하다. 동양평IC를 나와 20분 남짓 달려 안창면 지정로에 있는 흥법사지(興法寺址)에 도착했다. 둘러보니 영봉산을 배후에 두고 섬강(蟾江)을 앞에 둔 배산임수의 명당 절터다. 하지만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보물463호)와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464호)만이 절터였음을 알려줄 뿐 주변은 밭이다. 아마도 저 밭을 파보면 주춧돌이며 절의 흔적들이 많이 발굴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허허로우니 마음이 쓸쓸하다.

진공대사탑비는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이수(螭首)만 올려있다. 가운데 비신은 국립박물관에 조각난 채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마음이 애닯다. 탑비의 크기로 보아 이곳이 대찰(大刹)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진공대사탑(眞空大師塔)과 석관(石棺)(보물463호)은 터만 남고 국립박물관에 있으니 이 또한 이산의 슬픔이 아닌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나는 법인데 마음이 아프다.

남은 석조물 일부로 천년 대찰의 옛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본다. 폐사지(廢寺址)는 폐허의 공간이 아니다. 빈 절터의 흔적은 남아 천년의 시간을 이어놓는다. 절터의 탑비와 석탑이 천년의 시간을 가득 채워서 역설적으로 나그네에게 흥법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 흥원창 /사진=박성기 대표
▲ 흥호리 남한강변. 섬강과 합류되는 지점이다. /사진=박성기 대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폐사지인 법천사지(法泉寺址)로 향했다. 흥법사를 지나온 섬강이 흘러 홍호리에서 남한강과 만난다.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동강과 서강을 품고 오대천과 어천을 품으며 점점 큰물이 되어 부론면 흥호리에 이르렀다. 흥호리의 흥원창은 고려 때부터 이어온 12조창의 하나다. 흥원창은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되는 재원인 세곡을 저장하는 창고로 이 지역에 문물이 집중되고 교역이 활발했음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예로부터 이곳은 경제, 물류의 중심지다. 지금도 교통의 중심지다. 원주에서도 흥원창 주변에 거돈사와 같은 거대한 사찰이 존재하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

▲ 법천사지 당간지주. 두 기둥 사이에 깃대를 지지하고 큰 설법이 있을 때 깃발을 날렸다. /사진=박성기 대표
▲ 국보59호인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모탑비. /사진=박성기 대표
▲ 발굴중인 법천사지 /사진=박성기 대표
▲ 비신에 새겨진 여의주를 다투는 쌍용. /사진=박성기 대표
▲ 수백년이 된듯한 법천사를 지켜온 고목. /사진=박성기 대표

법천사지(法泉寺址)는 법천리 서원마을에 있다. 남한강을 따라 이뤄진 교역으로 인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자연히 대찰이 들어선 것이다. 법천리도 법천사에서 마을이름을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64년 법천사지가 발견되기 전부터 현묘탑비나 법천사의 유래가 있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법천사는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되었다. 진리(法)가 샘물처럼 솟는다(泉)는 법천사는 고려 지광국사 해린(海麟)에 의해 가람(伽藍)의 규모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법천사 남쪽 농가 뒤편에 당간지주가 있다. 이곳이 당시에는 절에 들어가는 입구였다. 당간지주는 법회가 있을 때에 깃대를 세워놓는 곳으로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법회가 열리는 날 하늘 높이 올린 당간지주에 묶인 깃대는 센 바람에 힘차게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다. 사부대중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는 나직하고 웅장했을 큰 스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당간지주를 살피고는 나와 450미터를 진행하니 법천사지다.

탑비전지 위의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국보59)는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부도탑비다. 지광국사 해린(海麟)의 공적을 적어놓은 것으로 귀부의 등에는 귀갑문을 새겼으며 ‘王’자를 양각하였다, 비신은 연꽃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새겨놓았고 현묘탑비의 옆면은 여의주를 놓고 노니는 쌍룡을 입체적으로 조각해 놓아 높은 고려 조각예술의 경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입적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중국의 구양순체로 새겨져있다. 현묘탑은 터가 이곳에 있는 것과는 달리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보존처리를 위해 대전 유성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 관리센터로 옮겨졌다. 어느 유물이든 제 자리에서 더 빛나는 법인데 아쉽다.

법천사지 앞 넓은 밭은 발굴 작업을 거쳐 한참 복원 중에 있다. 수많은 돌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것을 보며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족히 수백 년을 넘었을 속이 텅 빈 고목이 자리를 지키고서 지나는 객을 맞이한다. 풍상을 겪으면서 자리를 지키며 법천사지와 함께 늙어온 고목에 고개를 숙였다.

폐사지에서 느끼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처음은 빈 터에 남은 쓸쓸함이었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차오르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한참을 둘러보다 마지막 7km 떨어진 폐사지인 거돈사지로 길을 잡았다.

▲ 천년을 지켜온 거돈사지 느티나무. /사진=박성기 대표
▲ 계단을 오르면 거돈사지 전경이 보인다. /사진=박성기 대표
▲ 거돈사지 3층석탑. /사진=박성기 대표
▲ 금당지 안에 있는 부처님 좌대. /사진=박성기 대표
▲ 원공국사탑비. /사진=박성기 대표
▲ 용도를 모를 석물. /사진=박성기 대표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 거돈사지(居頓寺址)에 도착했다. 절터의 거대함에 압도되었다. 입구를 버티고 선 1000년이 되었다는 석축 기단 위 느티나무는 걷는 자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었다. 거돈사지와 함께 이어왔을 세월에 경의를 표했다. 느티나무 옆 계단을 올라 약 7500 평의 절터에 들었다. 앞서 살펴봤던 두 절터보다는 훨씬 잘 보존하였고 완성형이다. 폐사지 발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계단을 올라 마주하는 삼층석탑은 넓은 절터에 홀로 우뚝하다. 탑 뒤 금당지(金堂址)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주춧돌이 보존되어 있어 기둥을 세운다면 20여 칸의 대법당으로 추론할 수 있다. 금당 중앙에는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강암 불좌대가 있다. 불좌대에 부처님이 계셨더라면 합해서 높이가 족히 5미터가 되는 거대한 불상이었으리라. 금당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금당지 뒤로는 경전을 강의하는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큰 스님의 설법을 들으며 열심히 용맹 정진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날이 풀려 완전한 봄을 만끽하며 상념에 들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번뜩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 절터를 구경하였다. 사방에 전각들의 주춧돌이 발굴된 상태로 가지런하다. 지나는 곳마다 쌓은 석축이며, 물길을 낸 돌 하나하나에도 천년의 시간을 같이하는 소중하고 경건하다. 강당을 뒤로하고 산 언저리에 세워져있는 보물 190호 원공국사탑(圓空國師塔)으로 향했다.

세워져있는 승묘탑은 복제품이고 실물은 국립박물관에 있다. 이곳에 있는 것은 2007년에 세웠다한다. 실물의 감동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국립박물관 탐방을 약속하면서 탑을 뒤로하고 나왔다. 왼쪽으로 60미터 지점에 보물로 지정된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塔碑)가 있다. 귀부의 모양이 앞서 봐왔던 귀부들과 서로 달랐다. 귀부의 머리는 사나운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껍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양각으로 새겼다. 이수는 구름 속을 요동치며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비문에는 탑비의 주인공인 원공국사의 생애와 행적, 그리고 그 덕을 기리는 글이 실려 있다.

고려를 이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던 사찰은 임진왜란의 전화로 인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지역을 지나 북상하던 왜군이 승병의 거센 저항에 이 주변의 절들을 불태우며 지났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유난히 이 주변의 절들이 불에 타 폐사된 곳이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닐까?

흥법사지에서 처음 느꼈던 쓸쓸함은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를 돌아보면서 점점 가득 벅차올랐다. 우리의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마음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불경의 한 구절에 닿았다. 이번 기행은 비워낸 것이 아니라 가득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비움과 채움의 차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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