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도 정신이 멀쩡할 때는 사람을 굶기지 않았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명색이 386, 다시 말해 586 세대지만, 솔직하게 학생시절 시국시위에 열렬히 동참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니 잡혀갈 일도 없었다. 격렬한 시대 무임승차했다는 비판에는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당대 석학이 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딱 한번 연행된 날이 있다. 그것도 시내에 책을 사러 나갔다가 묻지도 않고 대학생은 전부 연행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 나는 그때 학부생도 아닌 대학원생이었다.

1990년 5월9일 민주자유당 창당일이었다. 1990~1995년의 집권당으로 지금 자유한국당의 전신이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주정의당과 합당해 탄생한 정당이다.

바람도 쐴 겸 교보에 책을 사러 갔었다. 시내가 뒤숭숭한 줄은 알았지만 대학원생과는 무관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기대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진압경찰 일부가 학생들에게 포위돼 장비를 뺏기는 일이 생길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다고 한다. 경찰들이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학생증 검사를 한 것은 전투복 차림의 전투경찰이었다. 그는 정중한 어조로 “대학원생이지만, 지금 상황이 심각하니 잠시만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예의바른 말을 믿고 따라갔더니 그는 전투복이 아니라 상하의 블루진 차림과 ‘뽀삐헬멧’을 쓴 이른바 ‘백골단’, 정확한 용어로는 검거전문 경찰에게 나를 인계했다.

여기서부터 세상이 전혀 달라졌다.

뽀삐모자는 정중한 말 따위는 태어나서 써 본적도 없는 사람인 듯 했다. 그는 다짜고짜 “이 XX 실실 쪼개?”라고 욕을 해가며 나를 바로 버스에 태웠다. 전투경찰들의 ‘닭장버스’였다.

차안의 좌석은 곧 나처럼 붙잡혀 온 남학생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의자에 앉으면 바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땅바닥만 보고 있는데 간간이 “안 숙여?” 고함과 함께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까 지금 30여개 좌석을 차지한 건 모두 붙잡혀 온 사람들이고 전경은 다섯 명이 안되는 듯했다. 맨 앞줄에 형사로 보이는 아저씨가 앉아있을 뿐이었다.

만약 정말로 시위를 하다 잡혀온 학생들이면, 합세해서 이 버스 역시 ‘해방공간’이 되고도 남을 상황인데, 봄철 시내구경하다 이렇게 된 사람들의 투쟁의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고우영 화백이 자신의 작품에도 언급한 명언은 있다. 매에 장사 없지만 매 맞고 성질 안 나는 사람 없다.

몇 차례 뒤통수 때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침내 “야 이 자식들아! 내 동생도 전경이다”라는 고함이 들렸다. 전경들은 역시 욕으로 응수했지만 약간 기세가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말없이 앞줄에 있던 형사가 그때 입을 열었다. “어이. 조금만 협조해 줘.” 형사는 전경들에게도 뭘 어떻게 하라고 애매한 얘기를 했는데 아마 이제 그만 때려도 되는 단계라는 신호였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검거된 게 아니라 격리되는 것이니 바로 풀려날 거라고 했다.

세종로 교보 앞에서 올라탄 버스는 종로경찰서를 거쳐 동부경찰서로 옮겨갔다. 버스에서 내려 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앞사람 허리춤을 잡은 일렬종대로 경찰서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갈 때 내 한 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흘러내려 오른 팔에 간신히 걸쳤다. 데모가 아니라 놀러갔다 잡힌 사람들이니 가방은 다들 하나씩 메고 있었다. 요즘 학생들 같은 백팩을 메고 다녔다간 ‘국민학생 취급’을 받던 시절이라 한쪽 어깨에 메는 가방이었다.

이걸 바로 메려고 앞사람 허리를 놓았다간 또 욕을 얻어먹을 테니 그냥 올라갔다. 오른팔 관절이 묵직한 원서 서너 권이 늘 들어있는 내 가방을 지탱 못하면 대열이 전부 넘어질지도 몰랐다. 이 때 누군가 잽싸게 나에게 다가와서 가방을 다시 어깨에 고정해줬다. 이보다 3년 전, 훈련소 입소식에서 졸도했을 때 조교들이 나를 업고 나간 빛의 속도와 느낌이 같았다.

난생처음 유치장 안에 들어갔다. 젊은 남자 30~40명이 들어찼다.

곧이어 형사인걸 알고 보니 딱 형사 인상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그가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한 얘기의 요지는 자신이 이 세계의 베테랑으로 우리 같은 ‘계급(?)’도 없는 것들을 상대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너희는 단순 격리차원에서 온 것이니까 곧 풀려날 것이다. 이 가운데 나한테 잡혀온 사람 있나? 없지? 나한테 잡혀왔으면 그건 중대 시국사범이다.”

진술서는 한 장 씩 쓰는데, 그 와중에 꽁보리밥 한 팩을 나눠줬다. 이날 경험에서 가장 깊은 인상이 남아있는 것이다. 팩 안에는 반찬용 단무지 한 조각도 있었다.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나눠주는 형사의 한 마디였다.

“두 개는 못 먹을 것이다.”

원한다면 두 개 아니라 세 개 네 개도 줄 수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얘기였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건 밤 한시쯤이었다. 보리밥 팩이 너무 희한해서 엄마한테 보여주려고 가방 안에 넣어왔는데 집에 와보니 쏟아져 있었다.
 

▲ 대형마트 행사장의 보리밥. 1990년 5월9일 유치장의 보리밥은 이렇게 다양한 색상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 투명한 팩에 담긴 보리밥에는 노란색 단무지 한 조각 만이 색깔을 갖고 있었다. /사진=뉴시스.


보리밥 팩은 ‘국가운영의 디테일’이라는 느낌도 남겨주고 있다.

이때만 해도 군사독재 시절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바로 다음 해에는 많은 학생들이 시위 도중 사망하는 불상사가 거듭 발생했다. 아직도 경찰서 갈 때 변호사 구해야겠다는 판단보다 살아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당연히 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그랬던 와중에도 국가는 연행자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대한다는 기본철학을 단무지 한 조각 갖춘 꽁보리밥 한 팩에 담았다.

심지어 수십만 대학생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 날에도 연행된 수 만 명의 젊은 애들을 밤늦게 허기지게 붙잡아 둬서는 안된다는 염려가 제도 속에는 담겨 있던 것이다.

국정이란 것이 그 누가 하더라도, 정해진 규칙대로 운영을 한다면 사람이 상할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독재자들도 데모해서 잡아온 애들을 굶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독재자들의 단점은 이런 몸가짐을 세상이 평온해 통치에 자신이 있을 때만 지켰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다급해지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 넘는 세월동안 국가의 과오 또는 실수가 결부된 불상사가 계속 발생했다. 그때마다 단순한 부주의가 아니라는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통치자가 국민 모두를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적과 아군으로 구분한다는 의심이 극심할 때 이런 불상사가 발생했다.

통치는 미운 사람에게도 꽁보리밥 한 팩을 책임지고 챙겨준다는 영혼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죄와 공을 논할 수 있다.

경제성장률 또한 정치중립적인 단어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만의 경제성장률만 따로 집계하는 법은 없다. 경제성장에 지지자들만 기여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미운 소리를 하지만, 일단 그 사람을 보호했더니 나중에 엄청난 성장동력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역사다.

전국시대 맹상군의 구도계명이라는 고사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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