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 에서 '무참한 소수의견'까지 다양한 소수의견 사례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2001년 6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2월 의사록을 읽고 있었다. 말미에 전혀 예상도 못한 내용이 있었다.

남궁훈 위원이 이때의 금리인하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남겼다는 것이다. 재정경제부(지금의 기획재정부) 출신 인사로 당연히 ‘비둘기파’일 것으로 여겨 기사를 쓸 때마다 그를 가장 강한 완화론자로 분류해 온 일에 갑자기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얼마 전 인터뷰 때, 남궁 위원이 내 기사를 언급하며 “나를 제일 비둘기파로 분류했더군요”라고 말한 적도 있던 터다.

금융시장의 선입관을 명백히 뒤집는 사례로 상당히 비중 있는 뉴스로 판단됐다. 본사에 연락해 사진기자 지원까지 받아가면서 남궁 위원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카메라까지 동원해 법석을 부리는 모습을 본 남궁 위원은 “무슨 일이야”라고 모른 척했지만, ‘이 시간 쯤 네가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울러 “내가 아직도 왕비둘기로 보이냐”는 반격도 엿보였다.

저녁 가판을 보니, 이심전심으로 한국경제신문의 오형규 선배도 같은 내용을 기사로 썼다. 오 선배도 나처럼 의사록을 끝까지 읽어보다 말없이 일어서서 비슷한 내용의 글을 썼던 것이다. 다만 나는 본사의 ‘기계화부대(?)’까지 동원한 만큼 조금 더 앞면으로 기사가 실렸다.

이날의 의사록은 9개월 전 관료출신 금통위원들이 뒤집어썼던 오해를 크게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금통위 회의가 장시간 격론 끝에 한은 집행부의 인상 의견을 뒤집은 적이 있었다. 소동 끝에 일부 한은 직원은 “몇몇 금통위원 집무실은 과천으로 옮겨라”는 격한 반응을 보였었다. 정부청사가 세종시가 아니라 과천에 있을 때다.
 

▲ 초대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모습을 그린 벽화 앞에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금통위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금통위원의 소수의견은 전적으로 ‘소신’에 의한 것이다. 한은 총재와 부총재를 포함한 7명 위원이 선역과 악역을 나눠맡는 따위의 ‘보이지 않는’ 역할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다.

1998년 현재의 통화정책이 시작된 후, 최초의 소수의견은 1999년 5월 곽상경 위원이 금리인상을 주장하며 남겼다. 이 때 의사록은 곽 위원이 반대했다는 기록만 있지 어떤 대안을 주장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대 교수였던 곽 위원은 초창기 금통위의 대표적 매파였다. 그의 긴축 성향은 같은 고려대 교수 출신 황의각 위원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대개 관료출신 금통위원이 금리인상을 반대하고 금리인하를 선호한다지만, 이 무렵 의사록을 실제로 보면 이게 딱 맞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 사례가 더욱 눈길을 끈다. 오늘날 관료출신이라 해서 무조건 비둘기 노릇만 하는 금통위원이 있다면 선배들 사례를 연구해보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일이다.

남궁훈 위원만 해도 완화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이 저때뿐만 아니다.

2001년 7월에 금통위는 또 한 차례 격론이 벌어졌다. 금리를 내리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전철환 총재가 인하를 적극 주장했다. 금통위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나중에 의사록을 보니 인하를 반대한 위원이 세 명이었다. 남궁훈 위원에 황의각 강영주 위원이 가세했다. 강영주 위원 역시 남궁훈 위원과 마찬가지로 재무관료출신 금통위원이었다.

이른바 ‘모피아’ 금통위원이 이렇게 금리인하를 반대하고도 무사할 수 있겠냐는 우려도 있지만, 강영주 위원은 임기가 절반 쯤 지난 다음해 초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숨어있는 모피아 매파도 한명 있었다. 장승우 위원이다. 그는 소수의견 형태보다는 논의과정에서 한은 집행부의 긴축 움직임에 적잖이 힘을 보태다가 2001년 8월에 금리인하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냈다.

다음해 초, 그는 강영주 위원보다 며칠 앞서 기획예산처 장관이 됐다. 그의 금통위원 임기는 거의 만료가 됐을 때다.

이와 같은 사례를 보면, 개별 금통위원의 소수의견을 금통위 전체가 시장에 보내는 신호로 간주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소수의견이 나와도 이들 주장과 반대되는 결정이 바로 다음 회의에서 연속적으로 이뤄지곤 했다.

하지만 소수의견이 개인의 무용담처럼 남발되는 경우가 나오기도 한다.

하성근 금통위원은 2012~2016년 4년 재임 중 9차례나 소수의견을 냈다. 모두 금리를 내리라는 것이었다. 임명 때부터 정권에 우호적이라는 경계감을 유발했던 인물이다. 학문적 성향이 정권의 입맛에 맞아 임명된 자체까지 뭐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견해가 다르다한들, 똑같은 자료를 똑같이 들여다보는데 4년 중 9번이나 한은 집행부와 의견이 엇갈렸다는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한은 아니면 금통위원, 둘 가운데 하나는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 될 뿐이다.

하 위원의 소수의견 남발은 김중수 당시 한은총재가 워낙 뚝심으로 금리정상화를 고집한 때문으로도 풀이된다.

어떤 위원은 오늘도 십중팔구 이런 주장을 할 것이 명백하다면, 그런 식의 ‘튀는’ 소수의견을 금통위가 시장에 주는 시그널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장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금통위원의 소수의견은 시장참가자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된다.

2004년 8월의 ‘황당한 금리인하’가 그런 사례다. 황당한 금리인하로 표현하는 이유는 이 회의 직전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를 내리는 건 황당하다”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는 자신이 금리인하를 주도했다.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의 경기부양론이 한은을 압도한 때문으로 시장에서는 풀이하고 있다. 이 때 금리인하를 반대한 소수의견을 남긴 건 이성남 금통위원이다.

이성남 위원은 부임 때 이른바 ‘이헌재 사단’이라는 지적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그는 팔이 안으로 굽기를 거부하고 ‘황당한 금리인하’에 대해 필마단기로 부당함을 지적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성남 위원은 4년 후 국회의원이 됐다.
 

시장에 '구해달라'는 시그널이 된 소수의견

한은 사상 가장 ‘무참한 소수의견’도 있다. 2004년 11월이다.

금리인하에 소수의견을 남긴 사람이 다름 아닌 이성태 당시 부총재다. 현직 부총재의 반대의견은 이 부총재뿐만 아니라 박승 당시 총재를 비롯한 한국은행 전체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이때가 극히 예외적으로, 소수의견이 ‘시장에 보내는 한은의 시그널’에 해당한다. 다만 그 신호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좀 살려달라’는 구조요청에 더 가깝다.

황당한 금리인하를 했던 박승 총재로서는 자업자득으로까지 지적받는 ‘금통위 반란’이었다. 한은은 금리를 내릴 생각이 없었지만, 금통위원들의 인하요구를 막지 못했다. 이 때도 이헌재 부총리 재임 중이었다.

현직 부총재의 소수의견으로 한국은행의 무참한 실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결과가 되긴 했지만, 이성태 부총재는 2년 후 한국은행 총재로 승진했다.

금통위 반란과 같은 말도 안 되는 파동이 한번 벌어지고 나면, 여론이 마침내 꿈틀해 한국은행법이 개정되곤 했다.

지난 12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금리인상을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나온데 대해 시장 일부에서는 ‘한은이 보내는 신호’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이를 금통위원의 개인의견일 뿐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소수의견 사례를 볼 때, 소수의견은 정말 ‘소신’에 따른 개인의견일 뿐이다. 금통위원들이 자유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역 악역을 나눠 역할 분담하듯 보는 관점에서 ‘시장신호’로 간주할 때는 오히려 정보혼선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다만, 시장이 이렇게 무리한 해석에 집착하는 근본 이유가 한은의 시장과의 소통 부재 때문은 아닌지 돌이켜 볼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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