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 분야 '신심 없는 개혁가들' 자성하는 계기 돼야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보신탕 논쟁 때마다 근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먹는 개 따로 있고, 키우는 개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최근 동물구호단체 케어 박소연 대표의 개 안락사 논란은 “청와대 입양시키는 유기견 따로 있고, 안락사 시키는 유기견 따로 있느냐”라는 반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번 사건에서 엄청난 수의 개가 구조한 사람 손에 생명을 잃었다. 당사자는 이에 대해 나름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일단은 모든 주장을 들어보고 결론이 나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소연 대표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영웅 이미지’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구호활동에 환호하고 후원한 사람들 가운데 수 백 마리 개의 안락사를 예상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유기견 토리의 입양을 주선하면서 명성이 절정에 달했었다.

천신만고 끝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기력이 달렸을 때, 부모님이 개고기로 기력을 보충해줬다고 밝힌 적이 있다. 모 연예인의 가족이 이에 대해 있을 수 없는 패륜적 악담을 퍼부었다.

보신탕 수요는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보신탕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먹어본 적은 있으되, 더 이상 먹을 일이 없어서 사실상 ‘안 먹는 사람’인데도 여전히 ‘먹는 사람’을 자처하면서 보신탕 논쟁만큼은 일전 불사를 마다않는 ‘옹호론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개고기에 대한 식욕문제가 아니다. 철폐를 주장한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앞서서다.

보신탕 반대를 비롯해 동물애호 운동은 모두 한국 시민사회의 지성을 더욱 높이자는 진보·개혁운동의 하나다. 개혁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던 민주화가 1987년 커다란 성과를 이룩한 후, 개혁운동은 사회 각 부문의 다양한 형태로 분화됐다. 때로는 ‘저런 것까지 무슨 개혁이라고 나서냐’는 말을 듣는 사람도 나타났다.

▲ 박소연 케어(구 동물사랑실천협회) 대표가 2013년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에서 개고기 반대를 위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987년 이전의 민주화는 ‘목숨을 건’ 인간성 회복 투쟁이었다. 지켜보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운동가들조차 싸우다 고문과 박해 끝에 사람이 죽는 걸 불가피하게 여기는 면도 있었다. 광주항쟁 이후에도 강제징집 대학생들의 의문사와 수지킴 간첩조작 사건 등 억울한 죽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시민들이 왜 자꾸 우리가 죽어야하냐며 들고 일어섰다. 1987년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계기가 됐다. 한국사회는 이후 5개월 만에 엄청난 민주화의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살인적 독재정권에 맞서던 시절, 저항 운동가들은 궁극의 승리를 위해 깨달은 것을 철칙으로 세웠다.

하나는 운동의 대의에 신심(信心)을 가져야지, 자기의 이미지나 과시하는 지적인 허영은 오히려 운동의 적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아직 인식수준이 뒤떨어진 대중을 타도대상으로 여기는 독선, 이들을 계도대상으로 여기면서 선구자인척 하는 오만을 모두 버리고 흙투성이 대중이야말로 이 운동의 뿌리임을 명심한다는 것이다.

데모하고는 담쌓고 살면서 시위대열을 보고 ‘땡전뉴스(9시 “전두환 대통령은...”이란 말로 시작하는 당시 관제언론을 비웃는 말)’의 멘트 그대로 냉소를 일삼는 후배조차 등굣길 내내 따뜻한 대화로 일관하는 운동권 선배. 알고 보니 나쁜 사람 아니고 또 얘기해보고 싶은데 며칠 후 수배자가 돼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형이 5공 시절 목숨 걸고 투쟁하던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다. 신심은 인식이 부족한 대중도 공유했다. 데모하는 놈들 미워죽겠지만, 도망 다니는 젊은 녀석 잡혀가면 죽을지도 모르니 일단은 누구나 숨겨주고 밥을 먹여줬다.

1987년 6월, 독재자를 몰아내고 목숨 걸고 투쟁할 일이 사라지자, 개혁 운동하는 사람들에게서 철칙이 희미해졌다. 그러면서도 목숨 걸고 싸우던 시절의 ‘도발적 투쟁 양식’은 그다지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게 지금은 생각 다른 사람들에게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다.

1987년 이후 개혁은 노동, 환경 등을 거쳐 여성, 동물 애호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됐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거창하게 무슨 개혁이냐’라는 반발을 면하는 길은 운동가가 신심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울 일이 아니더라도, 목숨 걸고 싸운 분들의 신심은 교훈으로 체내화시켜야 남들 앞에 나설 준비가 된 것이다. 그게 없으면 오히려 역풍을 일으켜 다른 운동가들의 고생까지 물거품을 만들고 만다.

정말 목숨 걸고 싸우던 시절에는 어디 가서 뭐하던 사람들이냐는 지탄도 나온다. 누군가를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처럼 지목해 강성 투쟁하는 말들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그런 의문이 당연히 들게 된다.

개혁을 주창하고 나설 때는 그에 따른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개 수 백 마리를 구조하는 일을 한 번이 아니라, 운동가를 자처하면서 할 때는 이 불쌍한 생명들의 먹고사는 걱정을 놓지 말아야할 책임이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와 체육계를 중심으로 한 미투는 지금도 한국 여성들이 악질적 토호에게 착취당하는 영역이 있음을 드러낸다. 여성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 한편으로 일부 충동주의적 여성들의 과시적 행태가 빚어내는 부작용은 가야할 앞길을 더욱 아득하게 만든다. 지하철 유리창의 시에 ‘여성차별’이라고 태그종이를 붙인 것이 출퇴근길 시민들의 눈에는 어떻게 들어왔을까.

충동주의적이고 과시적인 얼치기 개혁의 문제는, 운동의 출발지인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생각 다른 사람들도 포용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던 예전의 신심은 어디로 가고,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까지 타도대상으로 낙인을 찍는다.

이런 식의 개혁흉내는 운동이 아닌 지적 과시일 뿐이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을 때 성과는 없고 공허한 자취만 남을 것이다. 구조견 안락사 문제는 신심 없는 개혁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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