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서울 강남의 중국음식점에서 볶음밥을 먹다가 옆 테이블 손님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20~30대 남성들이었다. IT같은 어려운 주제의 뉴스를 무난히 소화해 낼 계층의 사람들로 보였다.

 
이틀 전, 미국 법원에서 삼성이 애플에 엄청난 패배를 당한 때였다. 앞으로 서울에서 애플 스마트 폰 사기어렵겠다는 얘기를 하더니 화제가 이 소송을 보도하는 기사로 옮겨갔다.
 
“어디 ‘자X’ 기사 중에는 ‘삼성이 독자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돼서 호재’라는 것도 있더라.” 일행의 쓴 웃음이 일제히 터졌다.
 
이들의 대화는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 중 이던 기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과연 나는 오늘 어떤 톤으로 뉴스를 전달 했나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 또한 다른 뉴스의 독자로서 이 젊은이들과 비슷한 느낌을 줄곧 받고 있었다. 그런 느낌은 미국 법원의 평결이 임박할수록 더 강해졌었다.
 
대표적인 예가 ‘마약했느냐’는 기사다. 아마 삼성 애플 소송에서 가장 많은 국내 언론사가 보도한 내용일 것이다. 루시 고 판사가 애플의 무리한 증인 요청을 일축하면서 “마약했느냐”고 질타했다는 보도였다. 소송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도 루시 고가 누군지 알게 됐다면 아마 이 기사 때문일 것이다. 애플의 무분별한 법정 행위가 결과에도 영향을 줄 거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킬 법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국내 언론이 똑같이 쏟아내는 것을 보고 현실은 삼성에게 불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지고 있는 측에서 부질없는 것에 의지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였던 것이다.
 
한국경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있는 이상, 국내 언론이 삼성에게 우호적인 논조를 지니는 자체를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전 세계 모든 언론의 팔이 안으로 굽는데 국내 기업들만 그런 보호조차 못 받아서는 안되는 일이다. 또 이렇게 치열한 소송 전쟁에서 삼성한테 유리하지 않은 기사는 국내 독자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외면을 받는 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특히 삼성에게 우호적이고자 할수록 정확한 형편이 전달됐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혀 삼성의 패배를 생각지도 못했다가 막상 결과가 닥쳤을 때 시장의 충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글쎄 우리가 이긴다니까요” 식의 보도 행태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꽤 오래전부터 많은 불신의 사례를 가지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중계권료 협상이 대표적일 것이다.
 
언론은 직전 LA올림픽의 흑자에 중계권료가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를 강조하며 서울 대회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라며 국민들의 기대를 한껏 부추겼다. 그러나 협상의 결과는 참담했다. 참패한 협상에서 조금이나마 몇 푼을 더 건지기 위해 전 국민들이 1987~1988년 2년 동안 소위 ‘서머타임’이라는 생소한 제도로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생활시간표를 깨야만 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보니, 어느새 국민들은 나름대로 언론 기사의 행간을 읽는 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말한 루시 고 판사의 “마약했느냐” 기사는 나름대로 언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가 됐다. 이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사태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는 역설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에 대한 이런 풍속도는 절대로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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