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부름 받고 필리핀서 귀국 했으나 장관 갑자기 바뀌어 또다시 방황

1995년 ADB에 파견돼 97년말 재정경제원으로 복귀하기까지 ADB에서의 2년반 남짓한 생활은 겉으로만 보면 화려하고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이었다.

직책을 이용해 세계 각국을 마음껏 여행할 수 있었고 필리핀 내에서의 삶도 고급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업무 또한 ADB내에서 한국의 위상이 작지 않았던 만큼 보람을 갖고 매사에 임할 수 있었다.
 
당시 ADB 고위층들이 많이 사는 ‘다스마리나스 빌리지’(Dasmarinas Village)에는 이멜다(필리핀 10대 대통령인 마르코스의 부인)의 집도 있었는데 이곳은 사막속의 오아시스, 또는 지옥에 둘러싸인 천국과도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돼 있었다. 또한 이들 지역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겐 으리으리한 집에다 운전사와 정원사 그리고 가정부 2명 등 4명의 도우미가 딸려 있을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도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ADB구역과 고급 주택이 있는 마을 밖에 있는 여타 필리핀 지역의 생활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스페인과 미국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았던 탓에 아직도 지배자들의 잔재가 남아 있었고 태풍의 발원지여서인지 1년에 몇 차례 씩 학교가 휴교를 해야 할 정도로 자연 재해도 빈발했다. 게다가 그들은 게을렀고 악착같은 정신도 없었다. 운전사나 정원사 등은 자기 할 일만 마지 못해 해놓고는 더 이상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어떤 목표나 희망을 가지려 하기보다 그때그때 편한 삶을 추구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가진 게 없었다. 시내를 지나다 보면 빈민이 많았고 도둑도 들끓었다. 과거 막사이사이 대통령 시절 그 부유했던 필리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100여년간 미국의 식민지배까지 받다보니 무기소지 또한 자유로운 국가였다. 겉으로만 보면 미국과 비슷하기도 했으나 미국 제도를 흉내낸 것일 뿐 내실은 미국과 완전히 달랐다. 그렇다고 마음이 온순하고 착한 것도 아니었다. 나이든 사람 중엔 한국전쟁 때 파병도 하고 도움도 줬다는 이유로, 예컨대 지금의 미국 대사관과 문화공보부 건물은 자기네가 지어줬다는 등 필요이상의 자존심을 내세우기도 했고 일부 젊은 층중엔 돈이나 물질을 좇아 줏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근무할 당시 ADB고위층들 사이에선 이런 국가에 ADB와 같은 국제기구를 계속 두는 것이 과연 옳은가하는 논의가 이뤄지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필리핀은 나를 포함한 외부인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필리핀 사회의 문란함은 곧바로 내게도 적지않은 피해를 안겨주었다.
 
한번은 컨설테이션 트립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우리 집 문이 열려 있었고 여행 중에 거추장스러워 집에 빼놓고 갔던 반지며 시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대표가 선물해준 기념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털리는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특히 출장가기 전에 ADB경찰들을 통해 현지 경찰관들에게 ‘Director Lee’의 집에 대해 특별순찰까지 요청하고 갔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순찰자들이 바로 도둑놈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외국 이사들이나 전임 한국 이사들 중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한번씩은 도둑을 다 맞아봤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사를 의뢰하려니 거꾸로 먼저 수사비를 달라고 하는 뻔뻔하고도 몰염치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손해를 본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 대표들과 교류를 강화할 목적도 있고 회원권 값이 한국보다 아주 싸기도 해 골프장 회원권을 두개나 사놨었는데 내가 한국으로 복귀한 뒤 월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원자격을 그대로 말소시켜버리는 바람에 이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
 
또한 필리핀에서 귀국할때는 마침 아시아 각국에 외환위기가 닥치는 바람에 자동차, 에어컨, 냉장고, TV 등 대부분 살림살이를 헐값에 간신히 처분하고 달랑 월급 모아둔 것과 퇴직금만 들고 들어올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필리핀 근무도중 도둑도 맞고 이것저것 손해도 보면서 내게 있어 이제 필리핀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불쾌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바람에 나는 1997년말 당시 재정경제원 장관의 부름을 받고 재경원으로 복귀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필리핀에 간 적이 없었다.
 
한편 장관의 지시로 재경원에 큰 뜻을 품고 복귀했으나 1997년말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재경원장관이 바뀌는 바람에 나는 다시 1급 상당 ADB이사 신분에서 재경원 본부 대기국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어 DJP연합정부(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간 연합 정부)가 출범하면서 재정경제원의 간판이 재정경제부로 바뀌고 재경부의 수장도 새로운 장관으로 교체되면서 나는 또 한차례 오뚝이처럼 일어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공직생활을 해 오는 동안 늘 내 주변에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질 때마다 신설조직에 발령받아 일하는 게 내 팔자였듯이 운명의 신은 이번에도 내게 재정경제부 근무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새로 금융감독위원회가 설립되자 정부는 내게 또다시 그곳 발령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재경부 장관 또한 내게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가길 권유하고 있었다. 나는 가급적 재경부에 남아 차관보 보직을 받길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보따리를 싸야 했던 것이다. 그때가 1998년 초였다. 그리고 이것이 재경부와의 마지막 인연이 될 줄이야. 나는 그후 금감위에서 장관급 직위에 까지 오르면서 공무원 생활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게 됐던 것이다.

 
 

필리핀태풍/사진은 내용과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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