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위원장으로 승진 하자마자 일촉즉발 대우그룹문제부터 해결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내가 2000년1월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에 오르자 그야말로 가장 큰 문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대우그룹문제 였다. 500%가 훌쩍 넘는 부채비율도 문제였지만 더 이상 기다렸다간 이들 부실기업이 우리나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를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우채 환매문제로 금융시장은 일촉즉발의 붕괴상황에 몰리고 있었고 대우 주요계열사들 또한 돈줄이 막히면서 벼랑끝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다급해지면서 나는 당장 대우그룹과 관련한 사태파악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심각했다. 1999년4월 기준 자료를 들여다 보니까 1995년 138개였던 계열사 수가 무려 289개로 불과 4년만에 151개나 늘어난 걸로 되어있었다. 주요 계열사의 재무구조가 급속히 악화되자 자회사 수를 늘리는 수법으로 부실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 왔던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대우그룹이 회사수를 급격히 늘리면서 회사채 발행을 남발했던 게 더 큰 문제였다. 대우의 회사채 물량이 대거 투신권에 흘러들어갔고 이들 채권의 만기가 속속 돌아오면서 투신권에선 대량환매사태가 예견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각한 사태였다. 내가 금융감독위원장에 취임하자마자 대우문제에 가장 먼저 손을 댄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우 회사채 중 일부가 해외투자자들의 손에 넘어간 것도 문제였다. 대우채 처리방안을 늦췄다간 가뜩이나 외환위기이후 치명타를 입었던 한국의 대외신인도에 다시한번 큰 금이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금감위 부위원장 시절에도 대우 회사채 문제가 불거지자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구조조정기획단장을 해외에 보내 대외회사채에 대해 일정액을 보전키로 하고 가까스로 문제를 수습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온 대책이 대우회사채에 대해선 원금의 95%까지 보전해 준다는 안이었다. 또한 이같은 보전안은 2000년 투신권 대우채 환매대책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1999년11월엔 대우채 환매사태와 관련해 금융시장안정종합대책의 일환으로 투신권에 공적자금이 일부 투입되기도 했으나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다. 99년말이 되자 대우채 만기일이 속속 도래하고 있었고 이것이 2000년 초부터 투신권 대우채 대량 환매사태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련한 대책이 2000년2월2일부터 8일까지 엿새동안 99년말까지 만기가 된 대우채에 대해 원금의 95% 수준에서 환매해 주고 향후 만기도래하는 채권에 대해선 순차적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한 내용이었다. 투신권에 2월 환매 태풍이 예고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고된 악재는 이미 악재가 아니었다. 우린 획기적인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대량환매를 차단하기 위한 각종 조치가 취해졌다. 우선 증권유관기관들을 동원해 36조원에 이르는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토록 했다. 아울러 은행 등 각 금융기관에 대해선 금리인상 시도를 차단해 나갔다. 이들 금융기관이 금리까지 올려가며 투신권 환매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나는 금융기관장들을 직접 모아놓고 금리인상시도는 물론 투신권 환매를 부추기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도록 강력 경고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돈이 갈 곳이 없어야 투신권 환매사태도 주춤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주효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 분위기도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만기가 되면 원금의 100%를 다 찾을 수 있는데 굳이 5% 손해까지 봐가며 일찍 환매에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막상 환매 기간인 2월2일이 돌아오자 시장은 의외로 조용했다. 정작 환매에 나선 규모가 예상액의 10%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간의 시장 안정조치가 먹혀든 결과였다.

일단 대우채 환매문제가 성공적으로 일단락되자 2월9일 대통령과 총리께서 연이어 “이 위원장 수고했다”며 칭찬하는 전화를 걸어왔고 나 또한 남은 대우사태 해결에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 내게 전화를 걸어 칭찬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내가 부위원장으로 재직하던 99년에도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도 대우가 갑자기 망하면 시장교란이 일어난다며 대우자동차와 대우전자 등 문제의 주력계열사를 해외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해 7월26일부터 8월17일까지 관계기관 대책회의 까지 열어가며 대우사태를 안정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대책들이 논의 됐고 어느정도 성과도 있었다. 또한 이 일이 있은 직후인 8월20일 오후 8시40분께 대통령께서 우리 집에 직접 전화를 걸어 “이용근 부위원장 잘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이날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아내가 전화를 대신 받아야 했지만 대통령께선 아마 그때부터 날 차기 금융감독위원장감으로 지목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2000년1월 내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을 때 한편에선 대우채 환매문제가, 다른 한편에선 대우그룹 주요계열사 구조조정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탓에 나는 금융감독위원장에 취임하기 무섭게 대우구조조정위원회부터 만들었다. ㈜대우와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그리고 대우전자 등 문제의 4개 핵심기업만 정리하면 우선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중 대우중공업의 경우 호주업체가 조선사업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입질을 해 왔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대우전자 또한 삼성과의 빅딜논의가 있었으나 가격문제로 무산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우전자에 대해선 해외매각을 염두에 두고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문제는 GM대우자동차였다. 대우자동차처리와 관련해선 1999년11월6일과 11월9일에도 대책회의를 하며 매각 계획을 논의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또다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우선 대우차에 대해선 GM이 지분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해 해외매각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만 GM에만 인수 기회를 줄 경우 매각가격에 불이익이 올 것을 우려해 포드 등 다른 경쟁사들에게도 인수자격을 부여키로 했다. 게다가 현대자동차측이 자신들에게도 대우차 인수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왔다. 내심으로는 현대그룹의 경우 자신들도 재무구조개선이 시급한 마당에 대우차까지 인수하겠다고 나오니 한편으론 기가막혔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대우차 인수대상에서 배제시킬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대우차 매각에 유리한 경쟁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우차 매각과 관련하여 한가지 해프닝도 있었다. 대우차의 우선협상대상자로 맨 처음 포드자동차가 결정되려는 순간, 나는 그들이 한국경제의 취약성과 위기 상황을 약점으로 잡고 협상가격을 후려칠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MOU(양해각서)협상 과정에서 일정 금액이상 협상가격을 내려치지 못하도록하는 최소한의 가격을 발표토록 했다. 그런데 그 뜻을 모르는 일부 계층에서는 그것을 마치 최종 입찰가격을 미리 발표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웃지못할 사례도 있었다.

나는 이같은 대우차 매각 계획을 세우고 난뒤 2000년4월14일 총리에게 보고했고 총리께서도 내 뜻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총리께서는 대통령께도 이같은 사실을 보고 했는지 4월27일 저녁이 되자 대통령께서 또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날 전화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듯 했다. 하나는 마침 다가온 내 생일을 축하해 주시려는 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대우차 매각과 관련해 보고를 들었는데 더 열심히 해달라는 격려의 의미인 것 같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더욱 용기를 내어 맡은 바 업무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또한 그러다보니 대우차와 대우전자 매각이 성사됐고 ㈜대우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대상에 올려 은행들로 하여금 자금 지원에 나서도록 했다. 특히 ㈜대우에 대해선 금융권이 자금지원을 꺼려하는 점을 고려해, 은행장들에게 신규자금도 넣고 출자전환도 하라며 독려하기도 했다. 대우그룹은 이렇게 하나하나 정리되어갔고 국내 시장에서도 드디어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논리가 깨지는 대표 사례로 기록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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