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부 근무시절 온갖 역풍 겪었지만 시련은 나를 더욱 담금질 했다

학교를 마치고 시작한 공직자의 생활은 내게 평생의 직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때로는 밤늦도록 직장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 마치 그게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다.

 
고뇌도 많았지만 보람도 많았다. 때로는 과제에 매달려 해법을 찾아 고민도 하고 또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온갖 세상을 다 얻은 양 보람도 느끼면서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또 그 당시는 그런 삶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면서 오로지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게 최고라는 사명감으로 하루하루 일과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동안은 직장이 시키는 업무 외에 다른 것들은 거의 거들 떠 보지도 않으면서 살아왔다. 내가 제안한 정책이 채택되어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집행되는 과정을 바라볼 때의 그 뿌듯함, 그리고 그것이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성취감에 흠뻑 빠질 수 있었기에 비록 힘은 들었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할일이 많은 나라에 태어나서, 또 이렇게 큰일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나를 있게 해 준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활력 넘치는 공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울러 일만 열심히 하면 그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더 많은 기회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생각에 ‘그저 일이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젊은 시절을 살아왔다. 그리하여 기획원 사무관시절부터 시작해 재무부로 적을 옮겨 과장직위에 있을 때 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대로 남부럽지 않은 공직생활을 영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야속한 세상은 날 무한정 그렇게 행복하게만 놔두지 않았다. 국장이 되고난 후 어느 날 부터 지역감정이 소용돌이치면서 나를 다른 세상으로 내 몰고 있었다. 괴로웠다.
 
어느 지역 출신은 괜찮고 어느 지역 사람은 안된다는 생각, 그것이 나를 비참하게 했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공직사회에선 언제부턴가 어느 지역 출신은 자신의 고향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기세등등 뽐내며 살아가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선 자기가 태어난 지역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원망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런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병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도 이런 어이없는 일이 고착화되는 세상이 되고 보니 세상이 딱하고 나 스스로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힘도 있고 부유한 상류층의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아무런 사회 경제적 제약도 받지 않고 취미와 적성에 따라 직업도 갖고 생활도 할 수 있었으련만 그렇지 못한 내가 한스러웠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행운을 잡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내게 있어 출생 지역만 놓고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마치 아무렇게나 던져진 주사위’나 다름없었다.
 
일인당국민총생산이 고작 100여달러에 불과했던 가난한 나라, 자원은 빈약하여 오직 노동력에만 의존해야 했던 나라, 게다가 남북은 갈라져 서로를 남보다도 더 적대시하고, 거기에 편승하여 군사독재가 합리화되고, 그 바람에 사회는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서로를 반목질시하면서 급기야는 지역감정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바로 그런 나라에서 내가 공직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역차별에서 오는 소외감과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별개의 문제처럼 여겨졌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나는 소외감에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어진 과제에 전력을 다해야하는 묘한 심적 갈등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나의 재무부 국장시절이 바로 그랬다. 부이사관, 그리고 이사관이라는 일정직급에 있으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보직을 얻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면서 후배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떠돌아야 하는 콤플렉스를 갖고 보니 정말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아니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괴로운 여로였다.
 
능력이 없어 아예 승진을 못하거나 공직에서 배제 됐더라면 차라리 후련하기라도 했으련만 동일직급에서 해외주재관, 외청의 분석소장, 국세심판관, 국제기구파견, 본부대기 등 외곽이란 외곽은 다 골라가며 돌리는 약올리기식 인사행태에 너무도 상심하고 좌절한 끝에 난 그만 속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누가이기나 보자는 오기가 샘솟기도 했다. 하지만 숨이 콱콱 막히는 하루하루들이었다.
 
국장시절 내내 내게 희망이니 이상이니 하는 말들은 한마디로 사치였다. 내가 공직사회에 존재한다는 것, 생존 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었다. 독재가 주는 억울함과 불공평이 주는 불만감, 그리고 소외감은 참으로 참기 힘든 시련의 연속이었다.

재무부 시절 직장의 동료들은 대개가 다 선량하고 우수한 사람들이었지만 승진이나 보직변경 등 이해관계가 얽히고 나면 반드시 지역문제를 들먹이는 못된 관행 때문에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익숙해져 있었다.
 
서열과 경력과 능력과 평판과 실적 면에선 앞서도 묘한 논리에 의해 차단당하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것에 정면도전한다거나 항의를 한다거나 불쾌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편협하고 잘못된 일이라는 세태 속에서 나는 그만 쥐죽은 듯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나마 명맥이라도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긴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런 고착된 현실이 누구의 손에 의해선지 조금씩은 개선되고 또한 시간이라는 마취약에 의해 서서히 잊혀져 간다는 사실이다. 가끔 그때의 차별에 의해 혜택 받은 인간들이 세월이 지나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우월감에 사로잡혀 으스대는 모양새를 보면 그 옛날의 그 차별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안겨줬나 하는 것을 새삼 다시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회고해 본다. 그 어떤 차별 속에서도 남에게 해가 가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늦게나마 그동안 인내의 보상으로 금융감독위원회 시절 고속 승진 속에 장관급 직위까지 오른 뒤 오늘에 이르러 이렇게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글도 남길 수 있게 됐으니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노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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