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 전 재무장관, 이수휴 전 차관 등 고마운 선배들 많아 행복

많은 사람들은 나를 호남사람으로 알고 있다. 전남 보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인근에서 고교까지 졸업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태어난 곳은 거기가 아니다. 이제 와서 밝히지만 나는 엄밀히 말하면 일본 태생이다.

 
나는 1941년 오사카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주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우리 가족은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리고 그리던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당시에 공업도시인 인천 근처로 갈 생각으로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우리가 탄 배는 대마도 인근에서 난파됐고 다른 배에 의해 구사일생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선 어머니보다 장남인 나를 먼저 구해주셨는데 어머니께선 그 후 틈만 나면 ‘가족이 물에 빠졌을 때 남편이 아내보다 아들을 먼저 구했다’며 농담으로 아버지를 향해 원망 아닌 원망을 하시곤 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쨌든 우린 예기치 못했던 난파사건으로 경인지방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보성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서 태어나 포항에 정착하는 바람에 경상도 태생이 된 것처럼 나 또한 일본에서 태어나 보성에서 새 보금자리를 트는 바람에 전라도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이 대통령과 난 나이도 같고 고려대학도 동기 동창인 걸 보면 꽤나 인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보성중학교에서 평생 잊지 못할 은사 한분을 만나게 된다. 바로 유씨 성을 가진 한문선생님이다. 내가 1학년일 때 유 선생님은 칠판에 ‘賣劍買牛’(매검매우, 칼을 팔고 소를 산다는 뜻)라는 한자를 쓰시고는 이 뜻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는 뜻입니다”하고 말했더니 그 선생님께선 굉장히 기뻐하시며 나를 두고두고 예뻐해 주셨다. 보성중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과 싸움도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유 선생님께선 “용근이 저놈이 저렇게 까불고 다녀도 공부를 잘한다”며 “우리학교 출신 중 가장 잘 될 놈이다”고 추켜 주신 분이었다.
 
한번은 내가 농업선생님의 별명을 부르며 놀리다가 훈육선생님에게 걸려 매를 맞고 있는데 유 선생님이 갑자기 오셔서 회초리를 빼앗는 바람에 풀려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먼 훗날 내가 금융감독위원장이 되었을 때 나를 때렸던 훈육선생님도 어느새 전라남도 교육감이 되어 내게 축하전화를 걸어 왔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몇 안되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무튼 유 선생님은 나를 그토록 아껴주고 틈만 나면 자신감도 심어주셨기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내 마음속의 스승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 선생님에 이어 또 한분 큰 스승이 있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서울대 행정대학원 재학시절 나를 지도해 주셨던 이한빈 원장이다. 그 분은 내 논문을 최우수 논문으로 뽑아 주셨을 뿐 아니라 기획원으로 인도해 가며 공무원의 표상을 가르쳐 주신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공직생활 내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너그럽고 세련된 스승으로서의 그분을 잊어본 적이 없다.
 
내가 군복무를 하던 1966년에 당시 이만희 감독이 만든 'Unforgettable Woman' 즉 ‘잊을 수 없는 연인’이란 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내게도 'Unforgettable Man'이 또 있다. 이규성 장관과 이수휴 차관이다.
 
나는 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하다가 재무부로 이적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재무부 내에서의 입지가 약한 편이었다. 과장 때도 그랬고 특히 국장시절엔 호남출신이라 하여 변변한 보직국장 한번 맡아보지 못하고 퇴출위기를 맞았을 정도로 나의 재무부 생활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내가 어려울 때마다 때론 상관이 되고, 때론 형님이 되어 나를 위안해준 분들이 바로 이 두 분이다.
 
사실 직장인의 입장에서 보면 승진을 시켜주는 사람이 가장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저 친형제처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행복한 때도 많다. 특히 이규성 장관께선 재무부 근무시절 내게 일도 많이 시키고 이것저것 많은 것도 가르쳐 준 아주 고마운 선배였다.
 
그 분이 차관보로 계실 때 난 과장자리를 여럿 거쳤는데 어렵고 처리하기 힘든 일이 생길 때는 늘 토론을 거쳐 해결방향을 가르쳐 주셨고 언제나 남모르게 잘 챙겨주었으며 항상 내가 외로워하고 힘들어 할 때 형님처럼 다정스럽게 많은 정도 베풀어 주었다. 또 그분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내가 찾아 갈 때마다 참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시곤 했다.
 
그런 그분이 내가 뉴욕재무관으로 근무할 때인 1989년9월 IMF총회 의장자격으로 뉴욕을 방문했다가 이듬해 장관직에서 물러나 하버드대학 연구원으로 다시 미국에 왔을 당시 내가 IMF협정을 맺었던 ‘브레튼우드’로 모신 적이 있는데 그 때 감개무량해 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특히 이 장관께선 그 때 나를 보고는 “실무 과장시절 기도 있고 전망도 있어 보여 여러 번 주시했다”고 말해 줬을 정도로 내겐 각별한 분이다. 이 장관께선 또 내가 어떤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라도 닥치면 언제든 달려가 상의를 드릴 만큼 믿고 의지하는 분이기도 하다.
 
이수휴 차관 또한 내겐 소중한 분이다. 특히 재무부 재산관리국시절부터 무려 10여년이나 한솥밥을 먹었을 정도로 공무원생활의 절반가량을 나와 함께 하신분이 바로 이차관이다. 내가 어려울 때마다 깊은 정도 많이 나눠주면서 형님 같은 역할을 해준 분이기도 하다. 이규성 장관과 이수휴 차관, 이 두 분은 내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재직할 때도 무슨 일만 있으면 전화를 걸어와 잘한 건 잘했다고 격려해주고 때로는 많은 조언도 해줬을 만큼 없어선 안될 선배이자 형님들이었다.
 
두 분께 이 기회를 통해 다시한번 그동안 끝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정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 생애에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분들로 기억되어질 것이다.

이규성 전재정경제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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