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극일', 두 나라 지성이 공감할 때 이뤄진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광부들의 탈출을 도왔다고 증언하는 일본인 노부부. /사진=뉴시스,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조선인 광부들의 탈출을 도왔다고 증언하는 일본인 노부부. /사진=뉴시스, 국가기록원.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진정한 '극일'은 일본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 이웃나라로 지낸 건 인류역사만큼 오래된 일이다. 이 긴 시간 두 나라는 그 어느 쪽도 상대방을 영원히 제압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극일'이란 말의 본 뜻은 일본을 없애자는 말이 될 수 없다. 여기서의 '일'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의미한다.

이 침략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것은 한국인을 비롯한 피침략국 민중들뿐만 아니다. 일본의 민중들 역시 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야심에 소모품처럼 희생됐다.

줄여서 표현을 '극일'로 할 뿐이지, 이는 군사대국화를 통해 또 다시 과거 범죄에 혹하고 있는 일본의 제국주의 잔재세력을 극복하자는 뜻이다.

따라서 진정한 '극일'이란 양식을 갖춘 일본인들의 동감을 얻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본이 1945년 패전 후 비록 군벌통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갖췄다고 하나, 일본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정치의 관성으로 인해 한국인들과 다른 과거사 인식을 갖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인간인식의 한계와 관련해 생각할 일이다.

그래도 저 사람들 사이에 양식을 갖춘 지성의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아직 대다수는 아니지만, 궁극의 '승리'를 이룩하는 핵심은 여기에 있다.

지금 일본의 무역보복은 단순히 선거를 앞둔 표계산, 한국 첨단산업에 대한 견제 차원이 아닌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 일본 초계기가 한국 해군함정에 위협비행을 한 것과 다 연결되는 일이다.

일본에서 정권을 가진 자들은, 20세기 냉전시기에 한국과 일본에 강요된 '화해'를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장차 세계정세를 그리 판단해 지금과 같이 돌변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아직 '화해'하기 전 단계인 1965년 이전으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또 다시 적대의 대립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고 있는 정황이 초계기 위협비행에서 드러났다.

비록 1965년 국교 정상화가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에 크게 미흡했지만, 그 세월동안 소중하게 남길 것은 있다. 일본이 아닌 일본인들과 함께 일하고 소통했던 기억이다.

민중들의 반응은 19일 한국에서부터 격화되고 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을 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국인이 나왔다. 이 뉴스는 국내포털에 나오기도 전에 뉴욕타임스가 보도할 정도로 외신이 현재 양국관계를 밀착취재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그의 극단적 선택에 대해 경솔한 평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안타까운 일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내 이웃인 일본인에 대한 물리적 공포분위기는 절대로 조성해서는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국민 자발적 힘으로 탄력을 받고 있는 불매운동까지 활력을 없애고 정부의 대응능력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달라야 한다. 2012년 중국내 일본기업과 일본제품을 부수던 중국인들과 달라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나의 일본인 친구가 전과 다른 불편이 없도록 내가 더 우정을 발휘하는 것도 커다란 '극일'의 방법이다. 이들은 훗날 고향에 돌아가 우리의 얘기를 친지들에게 전해 줄 사람들이다. 사태 악화를 갈망하는 일본의 제국주의 잔재세력들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 한국인들의 물리력 행사다.

한국의 공권력 또한 이런 시기에, 국내 체류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더욱 안심할 수 있는 조치에 나설 필요가 있다. 법의 행사는 만인에게 공평해야 하지만, 지금은 국가의 외교역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일들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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