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중 가장 부가가치 높은 감동을 주는 게 한국시리즈 시구인데...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올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시구자가 시구를 '실망스럽게' 던진 후 마운드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연기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너무나 가슴이 아픈 나머지 인스타그램에 사과하는 글도 올렸다.

시구가 과연 무엇이기에 시구 잘못 던졌다고 사과하는 일이 다 벌어졌나.

우선 시구가 절대로 만만한 게 아니다. 농구 자유투를 던져 링이라도 맞추는 것보다 시구를 땅에 닿지 않고 홈플레이트까지 던지기가 훨씬 어렵다. 멀리던지기가 아닌 투구를 얘기하는 것이다.

프로야구 최고지도자인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이 올스타게임에서 시구를 하는데 덕 아웃에서 나오는 댓바람에 그냥 공을 포수에게 바로 던진 적이 있다. 이날은 그의 평생 맞수였던 김성근 당시 한화이글스 감독을 비롯한 10명의 현역 감독과 전 구단 선수들이 그에게 감사패를 증정하는 뜻 깊은 날이었다. 그런데도 시구를 이렇게 멋쩍게 던졌다.

이유를 물어보니 "야구 선수출신인데 혹시 시구를 잘못 던져서 창피당할까 봐" 냅다 던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구가 어려운 것이다.

팬들이 시구를 통해서 원하는 것은 150킬로미터 강속구나 '닌텐도슬라이더'가 아니다. 그게 가능하면 그 사람은 와서 시구를 할 것이 아니라 어느 팀 소속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어야 한다. 요즘 이런 투수가 부족해서 팬들의 서운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구에서 팬들이 원하는 것은 감동을 줄 만한 사람이 나타나 그 자리를 함께 한다는 사실 자체다. 이른바 '패대기 시구'도 얼마든지 훈훈한 일화가 될 수 있다. 시구자가 어떤 감동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키움히어로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패배한 후 덕아웃으로 물러나고 있다. /사진=뉴시스.
키움히어로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패배한 후 덕아웃으로 물러나고 있다. /사진=뉴시스.

프로야구는 국내총생산(GDP)의 당당한 일각을 차지하는 성공산업이다. 이 산업이 생산하는 최대 부가가치는 승부결과가 아니다. 감동이다.

1984년 유두열의 '정의 실현' 3점 홈런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만 기뻐하고,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 박철순 등판에 OB베어스 팬들만 가슴이 벅찼던 것이 아니다. 야구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맛 볼 수 없는 감동을 누렸다.

'스몰마켓' 구단 키움히어로즈가 올해 포스트시즌 앞선 라운드에서 놀랄 정도의 짜임새 있는 경기력으로 야구팬들에게 야구의 격조를 선물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체력과 집중력의 고갈로 인해 첫 두 경기 끝내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천하를 평정할 실력의 야구팀도 뒤집기 힘든 심리적 압박이 야구단과 키움의 팬들 모두를 짓누르는 가운데 홈시리즈 3, 4차전에 들어갔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자체가 5년만이었다. 상대편 두산베어스가 5년 연속 진출한 것과 비교해도 키움선수들이 분위기 적응에서 불리했다. 여기에 두 판 연속 끝내기 패배가 더해 졌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두산만 하는 것이란 자조가 가득한 건 너무나 당연했다. 만약 이럴 때 예전 현대유니콘스 왕조 시절의 박재홍이나 심정수가 시구자로 등장했다면 키움 덕아웃과 관중석의 분위기가 어땠을까. '내가 이 팀의 선수로 우승해 본 사람이다'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현재 키움의 가장 충성도 높은 팬층은 삼미수퍼스타즈 시절부터 응원하는 사람들이 구성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명부의 30승 시절 2인자였던 임호균 등 이 팀의 '근본'을 일깨워 줄 '레전드'들은 얼마든지 있다.

짓눌린 압박감을 떨쳐버리고 투지를 다시 일으켜세웠다면 한국시리즈는 훨씬 더 멋진 경기를 이어갔을 것이고 4차전에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키움 레전드의 등장은 이 팀 팬들에게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예전 바로 이 그라운드에서 피땀을 흘렸던 스타들이 추억의 전설을 다시 안겨주는 자체가 바로 프로야구 산업의 가장 멋드러진 감동생산이다.

그런데 이런 감동을 만들어내야 할 구단의 역할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차지하고 나섰다.

올해 시구자로 선정된 인물들이 훌륭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3차전 시구자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메시지는 정말 귀중한 것이다.

단, 그가 던지는 메시지를 가장 강하게 전달하는 방법이 오로지 그날 그 자리였을까. 그리고 그 자리를 누구보다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었을까. 이런 고민을 제일 잘 할 수 있는 건 KBO의 공무원같은 사고방식이 아니다. 홈팀을 구성하는 팀과 선수, 그리고 팬들이 할 역할이다.

요즘 야구에서는 시구자로 대중예술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분명히 이들 연예인들과 프로야구는 '윈윈'의 관계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와 같은 시기에는 상당히 상황이 달라진다.

예전 한국시리즈 승부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날 한 연예인이 시구자로 등장했다. 그가 왜 그날 나왔는지, 그리고 그날따라 왜 그런 모습을 했는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에서 "나 좀 시구 시켜줘"라고 조르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야구팬으로서는 이 중요한 경기를 코미디프로그램 연장판으로 간주한다는 불만을 가질 일이었다. 정규시즌도 아닌 한국시리즈를 이렇게 다루는 건 프로야구 자체를 다른 문화의 하위존재로 격하시키는 행태다.

KBO리그를 메이저리그와 비교하면, 실력이 아직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감동을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철학자체도 크게 뒤진다. 이런 점으로 인해 37년이나 된 KBO리그 팀들은 아직도 독자적인 흑자를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이토록 소비계층이 탄탄한 프로야구를 40년 가깝게 적자가 당연한 듯 경영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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