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974년 대통령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서거하자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도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특히 당시에는 대사관 근처에 있던 중동고등학교 학생들이 거센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 앞에는 방석망을 갖춘 전투경찰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대단히 긴장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로 건너편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세련된 건물과 조경이 갖춰진 건물은 외국도시 일부를 옮겨놓은 듯 했다. 이 곳은 미국대사관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현재는 한진그룹이 호텔을 지으려는 부지로 비워놓은 상태다. 당시에 있던 건물은 오간데 없고 풀과 나무만 가득하다.

한진그룹은 6일 이사회에서 유휴자산인 이 땅을 팔기로 의결했다. 호텔을 짓겠다는 계획을 완전히 철회한 것이다. 학교근처인데다 역사문화재들이 가득한 곳이어서 호텔 계획이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터다.

역사적으로 이 곳은 조선왕조 개국을 기획한 정도전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다.

한진그룹이 호텔을 지으려던 송현동 부지(사진 왼편). /사진=뉴시스.
한진그룹이 호텔을 지으려던 송현동 부지(사진 왼편). /사진=뉴시스.

당시 정도전은 이 일대 어딘가 작고 단정한 저택에서 며칠 째 머물고 있었다. 그와 같은 당파를 이룬 남은의 첩이 살던 집이다.

집을 놔두고 대궐과 가까운 이곳에서 숙식을 한 이유는 매우 위중했던 임금 태조 이성계의 승하를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임금이 승하하면 최대한 빨리 입궐해 행정력과 대궐 안팎의 지휘계통을 확실히 장악해 자신이 후원하던 태자 이방석의 승계를 도우려던 의도로 풀이된다. 동시에 왕자 가운데 최연장자 영안군 이방과(정종)와 정안군 이방원(태종) 등이 부왕 부재중의 혼란에 편승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빨리 차단하겠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다양한 계책보다 이방원의 과감성이 한발 앞섰다. 1398년 음력 8월25일 밤, 이방원은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기병 10명, 보졸 9명을 거느리고 자택을 출발했다. 이방원은 이날 밤 이거보다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최초 목표이자 최대 목표인 정도전을 죽이려면 병력의 대소가 문제가 아니었다. 방심하고 있는 상대를 '출기불의'로 기습 공격하는 것만이 최대권력을 쥐고 있는 정도전을 없애는 길이었다. 그래서 정도전 기습에는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만 동원됐다.

지금의 대한항공 부지인 안국동은 당시 송현골로 불렸다. 이 때 이미 과밀도시였던 한양의 궁궐 근처는 사극에서처럼 큼직한 마당에 99칸 저택을 올릴 수 없었다. 왕의 코앞에서 대저택을 짓고 돈 자랑할 사람도 없었다.

마당은 손바닥만하지만 집채는 네 벌 씩 올린 매우 아담하면서도 고급스런 집들이 많아서 1970년대까지도 부자들의 집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집이 권문세가가 '작은 집' 살림을 하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방원의 심복들이 집안을 살펴본즉, 노복들이 모두 잠들고 정도전이 남은과 담소하고 있었다니 정도전은 이 때까지 이방원의 기습을 전혀 눈치 못 채고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반란군의 불화살이 지붕에 떨어지고 거센 함성과 함께 접전이 벌어졌다. 정도전은 담을 넘어 이웃집으로 숨어들어갔지만 집주인 민부의 고발로 붙잡혀 나와 이방원에게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밤하늘에 불화살이 날아가고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는 것은 대궐에서도 충분히 보고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대궐 경비를 맡고 있던 박위가 피리를 불면서 퇴근한 장군들을 비상소집했다.

정도전을 죽임으로써 거사성공의 90%를 달성한 이방원은 지금의 인사동 네거리에 모든 동원병력을 집결시키고 드디어 거사를 선포했다. 이 곳은 대한항공 부지의 귀퉁이와 닿아있는 곳으로 민영환 동상이 길 복판에 있을 때는 안국동로터리로 불렸다.

한진그룹과 별도로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기를 원한 종로구청은 한진그룹에 구청부지와의 교환을 제안한 적이 있다.

종로구청 부지는 정도전의 진짜 집이 있던 자리다.

한진그룹이 한 때 계획했던 송현동 호텔 자리는 이렇게 62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정도전과 관련된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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