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철지난 옛날 향수, 대제국을 무너뜨렸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현대국가가 되기 전 중국의 마지막 왕조는 청나라다. 이 나라는 290여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중국 왕조로서의 역사는 1644년 산해관 입성 후의 270년으로 봐야 할 것이다.

황실은 비록 만주족이지만 대륙을 차지한 후엔 만주족뿐만 아닌 중국인들의 왕조로서 본분을 강조했다. 만주족의 두발 변발을 강조한 것이 강한 선입견을 남기긴 했지만 변발뿐이었다. 유교문화나 사회체제는 중국 고유의 것을 그대로 수용했고 '만한일체'라고 해서 만주족과 한족이 함께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런 지혜로운 국가방침 덕택에 비록 소수민족이 이끄는 왕조였어도 그 어떤 역대 왕조보다 더 강성했던 나라를 1644년 산해관 입성 후 270여 년 간 이끌었다. 송나라가 강성한 북방 기마민족에 조공을 하면서 심지어 양쯔강 이남의 남송으로 위축됐다가 망한 것과 명나라가 276년 역사의 절반 이상을 국정난맥과 도적떼 난립으로 시달린 것과 형편이 크게 달랐다. 강성하기로는 또 다른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가 있지만, 칭기즈칸의 후예인 원나라는 중국 왕조로서 제대로 정착을 못해 대륙통일 100년도 안돼 다시 몽골로 쫓겨났다.

청나라의 전성기를 흔히 '강건양세'라고 한다. 4대 황제 성조 강희제의 61년 통치와 6대 고종 건륭제 61년의 통치를 포함한 1661~1796년의 135년간을 일컫는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건륭제의 치세를 전성기를 갉아먹은 기간으로 혹평한다. 강성한 국력을 누리긴 했지만 왕조의 위상이 이때부터 흔들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청나라 고종 건륭황제의 젊은 시절과 노년 모습. /사진=위키백과 퍼블릭도메인.
청나라 고종 건륭황제의 젊은 시절과 노년 모습. /사진=위키백과 퍼블릭도메인.

진정한 국력발전기는 '강건'이 아닌 '강온', 즉 강희제 61년과 5대 세종 옹정제의 13년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다.

전성기의 군주들답게 이들 세 사람은 강희제의 아들과 손자가 차례로 등극하는 순조로운 세습을 이뤘다.

아버지와 아들의 60년 통치 사이에 낀 옹정은 13년 재위기간 직접 정벌에 나선 적이 없고 대륙순행도 거의 안하고 오로지 집무실에서 밤새워가며 상주문들을 결재하며 국정에 매달렸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만큼의 건강을 누리지 못한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옹정은 44세에 즉위하기 까지 수많은 세월 황자로서 국정에 참여한 통치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체 번거로운 대외 활동 없이 효과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부황 시절 방만해졌던 재정을 튼튼히 잡는 업적도 세웠다. 만약 옹정의 이러한 살인적 근정(勤政) 또한 60년을 지속했다면 청나라 역사는 훨씬 더 길어졌을 것이다.

옹정에 이어 24세 혈기왕성한 나이에 즉위한 건륭은 아버지의 집무 방식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어깨너머로 건네 들은 할아버지 강희 시절의 호방한 통치방식에 훨씬 더 마음이 끌렸다.

건륭은 조부 강희, 부황 옹정과 달리 말년에 재위를 아들인 인종 가경제에게 선양하고 물러났다. 그가 61년 만에 물러난 것은 조부 강희의 61년 통치를 따라하겠다고 미리 공언한데 따른 것이다.

재위기간 뿐만 아니다. 건륭은 많은 정벌과 대륙순행을 통해 강희제의 풍모를 따라하려고 했다. 그러나 건네 들은 조부의 행적을 실천으로 따라하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희는 8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부터 제위를 노리는 권신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 임금이다. 그로 인해 강희는 이미 어린 나이에 세상의 온갖 쓴 맛을 통달한 사람이 됐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었고 그런 호기심이 백성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수많은 미행과 순방으로 이어졌다.

이런 마음의 깊이가 따라오지 않는 겉모습의 할아버지 흉내였으니 건륭의 대륙순방은 강희와 달리 수많은 비용지출을 초래했다.

조부와 부황, 그리고 청나라와 지배민족인 만주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쳤다. 그로 인해 3대를 위해 헌신한 한족 노재상 장정옥의 만년을 쓸데없이 괴롭혔다.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강성한 나라가 됐는지, 인간성에 기초한 이해를 스무 살의 부러울 것 없는 처지로 즉위한 황제는 끝내 얻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혈통과 만주족의 자부심만이 앞설 뿐이었다. 그러나 건륭 자신이 더 이상 만주족 8기군의 기질이 남아있지 않은 북경젊은이였을 뿐이다.

중국 경제가 44년 만에 뒷걸음질 쳤다.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동기 대비 6.8% 감소했다.

익히 예상된 부진이어서 금융시장에 별다른 충격이 없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시장에 충격이 없다고 해서 이 뼈아픈 결과를 세계2위 경제대국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44년 전이라고 하면 중국이 1978년 개혁개방에 나서기도 전인 1976년이다.

1분기 경제부진의 원인은 코로나19 바이러스다. 전례 없는 무서운 전염병 창궐이 인력으로 불가항력이라고 해도 확산 초기 중국의 대응이 전 세계에 큰 실망을 안겨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세계는 중국이 대국의 수준에 걸맞게 초기에 대응을 하기 보다는 사실을 숨기고 국제사회에 제대로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세계보건기구(WHO) 등에 대한 영향력을 통해 체면 차리는 데만 급급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

42년 전, '죽의 장막'을 걷고 개혁과 개방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전 세계에 조금씩 흥미진진한 기대를 주기 시작했다. 그 기대는 2000년대 들어 날로 번창하는 상하이의 스카이라인을 통해 엄청난 흥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10여 년 전쯤부터 중국이 약간 변한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기대와 흥분을 통해 세계인을 끌어들이기보다는 뭔가를 자꾸 강요하는 느낌이 커졌다. 앞으로 무엇을 새롭게 보여줄 것인지 보다 무슨 혈통 같은 것을 강조하는 느낌도 함께 커졌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지난 40여년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중국은 아직 세계 1위 국가로 올라서지는 못했다. 1위도 올라서지 못했는데 건륭제 같은 자부심부터 내세우는 모습이 최근 10년 동안 부쩍 늘어났다. 그 와중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일이 벌어졌고 경제가 44년만의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42년 전 개혁개방에 나서던 초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신호로 이보다 더 강한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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