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사과문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내부의 자세가 더욱 중요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분이 가장 많이 주목받고 있다.

로이터와 같은 외신에서는 바로 다음날인 7일 이에 대한 일부 전문가들의 회의적인 반응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사과문 행간에 숨어있는 내용을 발견해서라기보다는 재벌들의 개혁 행보에 대해 우선 즉각적인 비판부터 앞세우는 관행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고 이 또한 무조건 비판만 일삼는 전문가들이라고 역비판을 하기보다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일관된 목표를 위해 우리 사회 누군가는 늘 일관되게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평하고자 한다.

이 부회장의 '사과문' 전문을 읽어보면, 경영권 세습과 관련한 부분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결론을 한 줄로 요약한 부분은 "대한민국의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는 마지막 문장이다. 앞부분의 이런저런 내용과 함께 이 부회장이 앞으로도 삼성을 이끌어 지금의 고난을 타개해가겠다는 결의로 이해된다. 달리 말하면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삼성그룹뿐만 아니라 재벌그룹을 해체해야 된다는 원리주의적 재벌개혁가들에게는 당연히 실망스런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주요기업의 경영일관성에 따른 시장안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안도감을 주는 얘기다.

오늘날 한국의 금융시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투자분위기가 호전되는 곳이다. 삼성그룹과 같이 한국 경제에서 절대비중을 차지하는 대기업에 대해서라면 시장은 더더욱 경영의 일관성과 안정을 요구한다.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문은 냉정히 따져봤을 때, 앞으로 이걸 이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구체적이고 심각한 난관을 초래할 점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로선 그렇다.

자녀의 경영권 세습 불가부분도 그렇다. 이병철 창업주와 이 부회장의 부친인 이건희 회장은 몇 차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자의반타의반 선택을 했다. 이들이 일선에서 물러난 기간이라고 해서 삼성그룹의 경영이 급격하게 달라진 적은 없다.

더욱이 앞으로 고용은 사라지고 고도의 전문가시스템이 인간의 결정과정을 대신하는 체제의 진입이 불가피하다. 경영 역시 전문경영인뿐만 아니라 인공지능(A.I.)의 일종인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의 역할이 커질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굳이 "등기임원은 내 아들이 해야겠다"고 우기는 재벌이 몇이나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부에서는 주식 매각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사과문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식 매각까지 강요하는 건 선을 넘어도 지나치게 넘었다.

한국은 인구가 5000만 명이 넘는 큰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생각은 이쪽 극단에서 저쪽 극단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극히 일부는 재벌들 주식은 모두 국유화해서 모든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형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의 비중은 30년 전, 20년 전, 그리고 10년 전에 비해 급격히 줄어가고 있다. 개방된 사회정치체제를 갖추기 전 억압받던 시절에는 못 해본 제도에 막연한 환상과 동경이 있었다. 대통령이 재벌 총수를 집합시켜 정치헌금을 얼마씩 내라고 호통 치면서 말 안 듣는 재벌을 해체해 다른 재벌들에게 나눠주던 시절, 민중들이 자조적으로 부르던 '해방가'의 정서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재벌총수가 공개적으로 지분 정리 발언을 한다면, 그 기업 주가는 그날로 곤두박질쳐서 수많은 투자자들을 피해자로 만들 것이다. 총수 일가의 막대한 주식이 매물로 나오는 자체도 악재지만, 경영의 앞날이 불투명해지는 공포는 해당기업 주가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부회장 사과문에 "주식도 팔겠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한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굵직한 매직으로 대자보 써내려가던 시절의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행여라도 중책을 맡게 된다면 가장 먼저 격분할 사람은 재벌보다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개미군단'의 무수한 국민들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 건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고 직접 언급한 부분은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는 지금의 이재용 시대를 만드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안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자신의 경영권이 출발한 시점의 시비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일인데도 이 부회장이 직접 언급했다. 이걸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 바로 잡겠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자손들에게 똑같은 스트레스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의 근거로 볼 수는 있다.

이번 사과문에 대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과연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실질적 총수의 이례적인 문장 하나하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사과문의 진정한 의미는 아마 여기에 달려있을 것이다.

"기술과 제품은 일류라는 찬사를 듣고 있지만 삼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따갑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희들의 부족함 때문",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준법이 삼성의 문화로 확고하게 뿌리내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그룹 총수가 공개발언을 했다면, 이런 말을 하도록 초래한 그동안의 의사결정과정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뼈를 깎는 반성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인물들은 이미 은퇴했으니 굳이 개인의 잘잘못을 따졌을 때의 실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끌어나갈 사람들이 또 이런 오판으로 인류문명사를 거슬러 가게 하지 않게 하는 새로운 '모럴'의 정립은 필수적이다.

세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는데 "삼성은 이래야 한다"는 선대 회장시절 고정관념으로 총수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 끝내 사법적으로 험난한 날들을 보내게 만든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삼성과 같이 국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경제의 중추를 맡고 있는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경영학이나 전자공학만 깊이 파고들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것을 기초로 한 미래관도 갖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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