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관련, 잘못된 표현 나돌아도 방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역사책에는 '선왕'이란 말은 많이 나오지만 '전왕'은 찾아볼 수 없다.

선왕은 선대의 임금, 즉 돌아가신 왕이란 말이다. '선'이라는 글자는 어른에 관련해서 쓸 때 돌아가신 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제사 지낼 때 할아버지, 할머니든 증조부 증조모 든 모든 조상의 지방이 '선'자로 시작하는 건 이런 까닭이다.

그런데 임금들이라고 해서 모두 생을 마감함으로써 다음 왕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선왕이 된 건 아니다.

어떤 왕은 살아있는 동안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기도 했고, 반란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왕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아직 살아있으니 선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왕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오늘날 물러난 대통령을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고, 그가 서거한 뒤에도 '선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왕조의 임금들 간 관계가 공화국의 대통령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대통령들은 재임한 시기가 다를 뿐이지, 이들 사이에 서열의 우열은 없다. 그러나 왕조에서는 물러난 왕이 비록 실권은 없어도 현재의 왕보다 왕가의 웃어른 서열을 차지한다. 그래서 물러난 왕이 승하하면서 '선왕'이 되기 전에는 '상왕' 또는 '태상왕'으로 불린다.

이와 달리 반란에 의해 쫓겨난 왕은 권위가 완전히 무시되기 때문에 '상왕'커녕 '전왕'으로도 불리지 못한다. 그는 죽은 후 '선왕'으로도 불리지 못한다. 쫓겨난 날부터 영원히 '폐주'로 불릴 뿐이다.

그래서 왕에 대해서는 '전왕'이란 말을 쓸 일이 사실상 전혀 없던 것이다.

조선왕조 개국태조 이성계. 그는 1398년 정종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1400년부터는 태상왕이 됐다. 그를 선왕으로 부른 건 양위 10년 만인 1408년 승하한 이후다. /사진=뉴시스.
조선왕조 개국태조 이성계. 그는 1398년 정종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1400년부터는 태상왕이 됐다. 그를 선왕으로 부른 건 양위 10년 만인 1408년 승하한 이후다. /사진=뉴시스.

돌아가신 선대왕이나 살아계신 상왕을 "전왕"이라고 부르는 건 지금의 왕이 맞먹겠다거나 내 조상 아니라는 불경한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또 한 편으로 스스로 물러나 왕궁의 뒷전을 지키고 있는 상왕을 "선왕"이라고 부르는 건 죽은 사람 취급하는 행위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망발이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태정태세의 묘호로 부르는 것도 이와 비슷한 행위다.

한국 재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의 실질적 경영을 맡고 있는 두 명의 총수가 만났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다가 "선대에 없던 일"이라고 평가를 했다. 그런데 이 두 명의 총수는 모두 부친이 현재 생존해 있다. 비록 건강이 크게 나빠져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아직은 그룹의 회장 직책도 갖고 있다. 절대로 선대란 말이 나올 계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선대란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이는 1987년 이전을 언급한 것일 텐데, 2020년의 오늘을 33년 전과 비교하면서 "전례 없다"고 강조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쉽지 않다.

요즘 사람들이 예법에 많이 익숙지 않아서 의도하지 않은 결례가 나왔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해당 그룹의 본부부서가 포털 등 주요 사이트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에서 발견했다면 이는 대경실색할 일이다. 경우에 벗어난 표현을 서둘러 수정하도록 나서야 했을 것이다.

여염의 경우라도, 특히 연로한 부모가 병약할수록 자식들의 마음은 행여 돌아가신 후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길까봐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다. '오랜 병수발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이러한 때를 맞이하면 불효자라도 언젠가 한 번은 좋은 구경 한번 시켜드리고 싶었는데 갑자기 이리 됐다는 다급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행여라도 돌아가신 다음을 지칭하는 말은 입에 담기도 생각하기도 싫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병약해진 회장의 국제적 명성이 여전히 기업가치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회장이 연로하더라도 건강관리를 잘 할수록 순조로운 승계를 준비할 수 있는 더 많은 여유가 생기는데, 아직 나오지 말아야 할 '선'이란 글자는 많은 사람들의 정서에 너무나 어긋난다. 무엇보다 대그룹의 체제가 너무나 허술해 보이는 것이다.

사실상 '대리청정' 체제의 대그룹 임직원들이 전례 없이 조심스런 시기를 보내는 고충을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면에서의 더 많은 주의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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