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프로레슬러 천규덕이 지금은 탤런트 천호진의 아버지로 알려지는 건 기자와 같은 1970년대 어린이들에게는 '격세지감'이다. 비록 당대의 최고 인기 레슬러가 김일이었다고는 해도 천규덕 역시 당시 한국 어린이들에게는 정의를 지켜주는 두 번째 용사였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김일의 필살기는 박치기고 천규덕은 당수였다.

김일에게는 박치기 말고도 '코브라트위스트', '풍차 돌리기', '넉사자 굳히기' 등의 기술이 있었다.

이 가운데 넉사자 굳히기는 박치기를 대신한 피니셔(최후의 일격)가 되기도 했다. 요즘 미국 프로레슬링 WWE의 '피겨4레그락'과 비슷하다.

피겨4와 넉사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당시의 넉사자 굳히기는 너무나 강하게 들어가는 기술이어서 이 기술을 건 선수 본인도 풀지 못했다. 상대가 기권을 하고 나면 경기관계자 서 너 명이 링에 올라가 풀어줘야 했다. 이 당시 프로레슬링의 설정이 이랬다.

WWE의 전신인 1970년대 레슬링에서 전설의 흰색가면 레슬러 디스트로여가 이 기술을 갖고 있었다. 손목 힘이 엄청나게 강한 상대가 그에게 도전했는데 챔피언의 넉사자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손목 힘의 도전자는 다리의 고통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켜 손힘으로 챔피언의 가면을 찢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당시 국내 어린이잡지에서 읽은 내용이다. 누가 가서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어린이잡지에서 본 것이니 사실 '믿거나말거나'에 가깝다. 그런데 더욱 미스터리한 것은 찢어진 가면 속 챔피언 얼굴이 피투성이였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전설의 루테즈, '흡혈귀' 브라시, 반칙왕 브루노 등 미국 레슬링 얘기를 자주 소개했다.

김일이 1975년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를 서울로 초청해 경기를 가졌을 때 이노키의 넉사자굳히기에 걸려들어갔다. 앞서 이노키 가격으로 김일은 이마에서 엄청난 피를 흘려 가슴까지 적시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필살기까지 걸렸지만 김일은 필사적인 힘으로 이노키와 함께 링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경기는 무승부가 됐다. 이 경기는 기자가 TV로 본 것이다.

김일과 천규덕의 또 다른 큰 차이는 방송국이었다. 김일 경기는 MBC에서만 볼 수 있었고 TBC 레슬링에는 천규덕만 나왔다. TBC는 김일이 없어서 허전한 부분을 여러 이벤트로 채우려는 시도를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천규덕의 당수로 소를 쓰러뜨리는 것도 있었다.

예외적으로 1975년 김일과 이노키가 맞붙은 대회만 TBC가 중계했다. KBS도 레슬링을 한다고 해서 서둘러 TV 앞으로 달려온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올림픽 때 볼 수 있는 아마추어 레슬링 중계였을 것이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MBC가 중계하는 대회에 천규덕도 출전해 김일과 천규덕이 모처럼 태그조를 이룬 것을 한 번 정도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6년 3월 어느 날, 늦은 시간 레슬링 중계를 보고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열이 심하게 나서 며칠 학교를 못 갔다.

어린아이가 감기 걸리는 건 분명히 다른 사유가 있었겠지만 나는 그 전날 레슬링이 너무 끔찍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TBC가 중계해 이 대회의 에이스는 천규덕이었다.

메인이벤트가 태그매치로 상대는 일본의 악역레슬러들이었다. 다른 대회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한국 시청자들에게 새삼 '나쁜 놈들'로 소개할 필요도 없는 선수들이었다.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반칙왕'을 보면 '악역' 레슬러들이 실제 인생에서 겪는 애환도 뭉클한 데가 많긴 하다.)

이들이 며칠 전 천규덕 얼굴을 물어뜯어서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는데 이 반창고를 뜯고 또 다시 상처를 물어댔다. 당시 흑백TV 화면에 천규덕 얼굴이 피범벅이 됐다.

물론 그 와중에도 천규덕은 당수 세례로 승리를 얻었다. 이 당시 우리 어린이들의 불만은 저 못된 악역들 역시 피바다가 돼야 마땅한데 정의로운 선수들은 승리만 거두고 만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76년 김일이 교통사고로 붕대를 한 상태에서도 대회를 한번 치른 후에는 좀체 프로레슬링 대회가 잘 열리지 않았다. 레슬링을 언제 또 하나라며 TV 앞에서 기다리던 어린이 기억으로는 그렇다.

고 천규덕 프로레슬링 선수의 2014년 모습. /사진=뉴시스.
고 천규덕 프로레슬링 선수의 2014년 모습. /사진=뉴시스.

김일과 천규덕이 장식하던 '영웅'의 자리는 1977년부터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의 캐릭터들이었다.

'600만불의 사나이' 스티브 오스틴이 먼저 나타나 우리들은 힘을 쓰려고 할 때 "치치치치치치"하는 소리를 냈고 멀리 바라볼 때는 "뚜두두두두"라며 TV에서 본 효과음 흉내를 냈다.

곧이어 600만불 사나이의 약혼녀 소머즈가 가세했다.

천규덕과 김일이 TBC와 MBC로 갈리듯, 600만불 사나이와 소머즈도 두 방송국이 나눠서 했다.

TBC는 미국판 '슈퍼히어로' 전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굳히기로 작정한 듯 했다. 우리가 '내년엔 머리 깎고 중학생이 될 마음가짐'을 갖기 시작한 2학기에 '원더우먼' 방송도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김일과 천규덕에게 의지했던 우리 세대는 중학생 시절 이들의 빈 공간을 헐크에 이르기까지 외국의 창작물로 채워 넣었다.

향년 88세로 2일 타계한 천규덕은 우리 세대에게 그러한 '문화코드'였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국민들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우리 어릴 때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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