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없는 성장'의 대안 기본소득, '통제사회'의 요소는 불가피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기본소득은 쉽게 말해 '공짜 임금'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면 '복지과잉'이라고 펄쩍 뛰면서 자동적으로 몇몇 중남미 나라를 입에 담을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지금은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기본소득의 전제에 동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복지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정파가 먼저 기본소득을 거론할 정도다.

상황이 이렇게 바뀐 데는 기본소득에 대한 여러 전문가들의 다양한 연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국민과 국가의 새로운 관계가 제시됐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국가가 방역을 위해 국민들의 정보에 적극적으로 접근을 하고 있고 국민 절대다수가 이에 동의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나 앨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 미래를 다루는 소설에서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생활에 광범위하게 간섭하는 국가의 모습까지 엿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래소설의 강력한 국가에 대해 독자들은 언젠가 어떤 과정으로 무시무시한 독재자가 등장해 권력을 차지한 것으로 전제한다. 이와 달리 지금의 한국 방역당국이 국민들의 휴대전화와 신용카드 정보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절대다수 한국국민들이 동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기술이 더 빨리 개발돼야 하고 당국은 더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방역정보를 얻어야 하며 이를 방해한 사람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미래 통제사회를 다룬 1985년 영화 '브라질'에서 주인공이 환상 속에서 연인과 함께 풍요로운 체제의 벽을 뚫고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 /사진=유튜브 화면캡쳐.
미래 통제사회를 다룬 1985년 영화 '브라질'에서 주인공이 환상 속에서 연인과 함께 풍요로운 체제의 벽을 뚫고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 /사진=유튜브 화면캡쳐.

기본소득은 '공짜 임금'이란 점에서 확대된 복지정책으로 간주되기 쉽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보다 새로운 거시경제정책으로 봐야 한다. 국가가 당장의 재정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을 높이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국가는 예전의 복지제도들과 달리 상당히 빠른 경로로 이에 따른 효과가 국가전체에 돌아올 것으로 기대를 하면서 설계하는 것이다.

국가는 기본소득을 국민에게 지급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금융정보에 대한 일정한 접근권을 확보할 수 있고, 또 수령의 기본 자격을 설정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기본소득은 미래의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대안이다. 인간보다 더 훌륭한 인공지능들이 더 잘 생산하고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고용을 통한 급여지급으로 경제가 돌아가게 할 수 없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놀게 된다. 대다수 국민이 일자리가 없고 돈을 못 벌게 되면 소비가 사라진다. 이는 산업기반의 상실로 이어진다.

똑똑한 몇몇 엘리트가 엄청난 생산을 하면 그 혜택을 국가 곳곳에 골고루 나눠줘서 전반적인 국가경제가 계속 가동할 수 있게 하려고 기본소득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러한 취지를 생각하면서, 국가는 기본소득의 제도를 마련해야 그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기본소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불가피하게 국민의 정보를 얻게 된다. 기본소득을 수령하면서 국가가 광범위하게 신상정보에 접근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이 효율적인 통제가 필요할 때 이 정보들이 쓰이게 된다.

또한 국가는 일부 국민이 이 돈을 쓰지 않으면서 차곡차곡 통장에 쌓아두고 외출도 안하면서 아무 경제활동을 안하고 법에서 금하는 인터넷 활동만 하는 것이 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지급의 조건으로 몇 가지 금지행위를 설정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취업하지 않은 국민은 일주일이든 2~3일 간격이든, 또는 몇 개월 간격으로 정해진 지역 내 장소로 잠시 집합했다가 해산하는 것을 지급조건의 하나로 추가할 수도 있다. 이런 조치는 국가나 지역사회가 필요할 때 가용인력의 동원 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겉으로 보아서는 '공짜 임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공짜가 아닌 기본소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실 기본소득은 이런 성격을 갖고 있어야 이미 존재하는 복지제도와 차별화될 수 있다.

국가가 돈도 주고 필요할 때 나를 포함한 모든 이웃의 안전을 확실하게 지켜주지만, 반드시 감수해야 할 희생이 있다. 바로 사생활의 자유다.

절대 비밀이 보장돼야 할 집안에 있을 때만 빼놓고, 대문 밖을 나서면 모든 이동경로까지 다 국가의 정보망에 저장되게 된다. 첨단기술의 발달 속도를 보면 이것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이다. 그 대신, 개개인 정보에 대한 접근권과 한계를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한국과 비교하면, 서유럽 선진국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정보공개사회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한국도 자유의지가 침해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거부는 이러한 자유의지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거부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되, 국가의 혜택을 그만큼 덜 받게 된다. 말하자면 정보사회의 '자연인 선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의 정보는 기본소득 수령자들 사이에서는 연결이 전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수령자가 '자연인'과 접촉한 부분에서 국가 정보망은 급격히 축소된다. '자연인'을 선언한 사람들을 모두 묶어 '정보접근 제한자'의 영역으로 두면, 정보망 내에 머문 국민들의 관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염병의 유행시기와 같을 때 '자연인'을 접하고 온 정보망 내 국민에 대해서는 그 사실만으로 당분간 별도관리를 하는 방식으로 고도의 통제체제를 빈틈없이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인은 노숙자나 체제거부자가 아니다. 이들은 단지 사생활의 자유를 고전적 수준으로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보호를 국가로부터 받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들도 소득에 대한 세금은 내야 할 것이고 명백히 공공의 안전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속을 받을 것이다. 다만 모든 행동을 국가가 일일이 다 알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커다란 불확실성에 노출된 사람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권의 존재는 기본소득을 매개로 더 빨리 다가올 미래사회가 1984나 위대한 신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통제사회로 편입되느냐 아니냐의 구분선이다.

먹고 살 걱정없고 지혜가 많아 생활력이 강하며 상상으로는 모든 극단적 생각도 해야 되는 예술가나 사상가들, 또는 정보사회 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이제 완전한 자유를 찾고 싶어진 사람들이라면 기본소득과 그에 따른 통제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계가 고달픈데 경제침체까지 겹친 가운데, 국가의 든든한 사회안전망 속에서 생업에 전념하고 싶은 서민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거부권이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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