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기일이 전에 없이 엄청난 뉴스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맏형 이맹희씨 간의 상속다툼이 이병철 회장 추모를 둘러싼 삼성그룹과 CJ그룹간의 힘겨루기로 양상으로 변했다.

 
선영 일대의 사진을 놓고 군사작전을 설명하는 듯한 브리핑도 있었던 모양이다.
 
언론은 이런 소란과 관련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입을 벌리자마자 ‘추태’라는 비난부터 쏟아내고 있다.
 
형제, 숙질이 뒤죽박죽이 된 재산 다툼은 재벌가가 아니라 여염의 일이라 해도 좋게 봐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언론이 쓴 소리를 쏟아냈으니 본지 지면을 통해서는 “슬기롭게 해결하기 바란다”는 여망을 전하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나쁘게만 볼 수 없는, 어찌 보면 한국 경제의 고질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는 측면이 엿보여서 그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가끔 삼성에 관련된 기사에서 ‘범 삼성가’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최근의 삼성-CJ 갈등을 보면 이 말이 얼마나 실체가 없는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재벌 규제에 관해서는 ‘특수 관계인’이라는 단어도 등장하는데, 이제 이건희 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특수 관계인으로 규제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법정에서도 만나고 제삿날에도 다퉈야 하는 특수한 관계이기는 하지만, 재벌 규제론에서 소개하는 그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열 분리’의 힘이다. 이병철 회장 타계하면서 갈라선 삼성과 CJ만큼은 더 이상 한 통속의 재벌로 부당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일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저렇게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를 두고 숙질간에 실력대결을 하는 마당에 삼성-CJ간 내부거래(?) 따위가 가능키나 하겠는가.
 
몇몇 재벌은 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딸에게 계열분리를 시켜놓기도 한다. 이런 재벌에서는 아직 아버지 회장의 지배력이 살아있어서 그다지 계열분리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정신적으로 묶어놓던 어른이 더 이상 안계시면, 계열분리된 ‘새끼 재벌’들은 완벽하게 남남으로 돌아서는 것을 지금까지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이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얘기다. 형제의 인연을 초월해 합리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학에서 전제하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 또 그래야만 솜씨 좋은 이론가들이 국가를 위해 연구해 놓은 학문적 모형이 효과를 낼 수 있다.
 
지금 재벌을 개혁하자는 얘기가 빗발치고는 있지만, 아직 한국 국민의 절대 다수는 회장 돌아가시면 모든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라고 요구하는 사고방식에 절대 동의하지 않고 있다.
 
단지, 하늘이 내린 창업회장 만큼 아들, 손자들이 능력을 갖췄는지는 지극히 불안해 하고 있다. 자식을 알기는 아비만한 사람이 없다는 옛말처럼 2세, 3세의 능력은 지금의 재벌 회장들이 제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게 마련이다. 자녀들 소질에 맞게 지금 있는 회사를 계열 분리해 나눠주면 삼성-CJ-신세계처럼 각자 제 갈길 찾아 작게 나온 집을 다시 크게 만들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 자녀들간 우열의 차이가 아주 극심하다면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식이 다시 큰 집으로 뭉쳐 놓을 수도 있겠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면서 아들 딸과 손자들의 능력을 일일이 헤아려 계열 분리를 시켜준 것은 지금 생각하면 삼성 창업에 못지않은 커다란 슬기의 발로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렇게 분리된 기업들이 모두 현재 자기 분야에 더욱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해 있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호암이 제일제당과 삼성, 이렇게 구분하지 말고 삼성생명 등 금융사들을 하나로 묶고 삼성전자 그룹을 별도로 묶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만약 23년 전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쯤은 아무런 국민적 정서의 저항 없이 삼성은행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