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항열, 흉노 도우며 조국 한나라 난처케 했지만 교훈도 제공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한나라는 개국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통일했지만 이제는 흉노의 침략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리는 처지가 됐다. 군사력도 부족하지만 유목민족인 흉노는 어디 특정한 지점을 목표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고조부터 흉노의 임금인 선우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것으로 일시적인 평화를 얻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황제의 마지막 체면을 지키기 위해, 친 딸이 아닌 다른 궁인이나 황족의 딸을 양녀로 맞아 공주로 봉한 후 시집을 보내는 편법을 택했다.
 
고조의 아들인 문제 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때 시집가는 공주의 측근 인력으로 연나라 출신 중항열이 선택됐다. 중항열은 흉노 땅으로 가기 싫었지만 조정의 뜻을 되돌리는데 실패했다.
 
마침내 그는 “나를 보내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조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박탈감을 중항열은 새로운 나라 흉노에 충성하는 것으로 극복해갔다. 
 
그는 선우에게 한나라의 선진 문물 속에 숨어 있는 함정을 경고했다.
 
“흉노 인구는 한나라의 일개 군에도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또 그것들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뒷부분의 얘기는 마치 1980년대까지 맹위를 떨치던 제3세계 이론을 2000여년의 시간을 앞당겨 듣는 느낌이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게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한나라 값진 물품의 실상을 지적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옷을 얻으면 그것을 입고 가시밭을 헤치고 돌아다니게 하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고 나면 사람들은 흉노의 가죽과 털옷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나라의 음식을 얻으면 흉노의 우유음식처럼 편리하고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걸 알게 하십시오”
 
한나라의 선진문물에 달통한 그를 흉노 선우는 크게 신임해 한나라 조정과 교섭하는 일을 맡겼다. 중항열은 또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 인구와 가축 통계를 내도록 했다. 오랜 세월 흉노라는 민족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조국에 대한 원망으로 변절한 것만은 아니라는 추론을 해볼 여지가 있다.
 
중항열은 냉정히 흉노를 살펴 본 즉, 이 불쌍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길을 머나먼 중국 본토에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제 흉노에 가서 살라고 하니 과연 본인의 심중에 갖고 있는 흉노 발전을 실천해서 조국을 배신해야 되느냐 마느냐의 심적 갈등을 겪었을 법 하다. 지금처럼 세계인의 개념도 없던 시대에 그냥 자기 가슴에 묻어두면 그만인 비책인데, 굳이 이걸 꺼내 쓰게 만든 건 한나라 조정이었다.
 
환관 출신이 새로 가세했다고 해서 흉노 군사력이 더 강해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군사적 열세에도 문화적 우월감으로 허세를 부리던 중국의 지배층에게는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안겼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중항열은 오늘날에도 민족의 배신자로 중국인들이 지독하게 미워하고 있다.
 
외교 현장에서 중항열은 예전 자신의 동료 관리들과 논쟁도 벌였다.
 
한나라 사신이 “흉노는 노인을 천대한다”며 좋은 음식을 젊은 사람들이 먹는 흉노 풍습을 비꼬았다. 중항열은 “한나라 풍속에도 자식이 군대를 가면 노인들이 두껍고 따뜻한 옷을 벗어주고 맛있는 음식을 주지 않는가”라며 “이것은 모두 건장한 사람들을 든든히 먹여 노인들 자신도 보호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흉노 풍습의 단편적인 사실만 과장해서 경박한 입놀림을 한 한나라 지식인들에게는 통렬한 한방이다.
 
한나라 사신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흉노의 ‘형사취수’ 풍습을 비판했다.
 
중항열은 “그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며 “그 때문에 흉노는 비록 어지러워 보이기는 해도 종족이 유지되지만 중국은 친족관계가 멀어지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고 맞받아쳤다. 중국과 흉노의 풍습에 정통한 사람은 오직 중항렬 한 사람 뿐이니 더 이상 논쟁이 무의미했다.
 
중항열은 “여러 말이 필요없다. 한나라에서 보내오는 비단 무명 쌀 누룩이 수량만큼 좋은 것이면 그만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려 흉노의 기마병이 모두 짓밟아 버릴 것이다”라고 논쟁에 쐐기를 박았다.
 
중항열의 사망 기록은 아직 찾은 것이 없다. 풍토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그는 시대를 크게 앞선 타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로 새로운 자신의 위치를 굳혔다. 조국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으나 그의 행동은 원래 조국이 안고 있는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질타해 이를 개선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효문제의 다음인 효경황제 때는 흉노의 요구가 더한층 높아진다. 이제 황제의 딸 아닌 여자를 공주라고 보내지 말고 황제의 친 딸을 보내라고 요구해 온 것이다. 이 또한 한나라 황실의 사정에 정통한 인물이 있지 않으면 곤란한 요구다.
 
효경황제는 이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공주가 시집가면서 친정인 한나라에 30년의 평화가 찾아왔다. 이 30년 동안 한나라는 군사력을 강화해 그 다음 효무황제 때의 흉노정벌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때 중항열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쩌면 그는 200년의 배신자요, 만대의 선구적 다문화 지식인이란 평가가 맞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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