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는 앞선 태종 18년, 양녕대군 폐세자에 반대해서 쫓겨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은 자신의 승계를 반대한 황희를 오히려 중용해 역사에 길이 빛날 성군과 명재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 고사의 이면에는 황희를 쫓아냈다는 태종 이방원의 연출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죽기 직전의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는 일에 익숙한 구인이므로 가히 불러서 쓸 만하다”고 조언했다. 정말로 공이 많았던 권신 이숙번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시 불러들이지 말라”고 못박았던 것과 전혀 다른 당부를남겼다. 그해, 황희는 남원에서 서울로 돌아와 태종이 승하한 5개월 후 다시 관직에 기용됐다.
 
자신은 벌을 주면서 아들한테는 크게 중용하라고 조언을 하는 이 대목은 제왕학의 고전적인 노하우다. 당태종과 이적의 고사와 똑같은 구도를 갖고 있다.
 
▲ 당 태종 이세민의 모습. 그는 개국임금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다. 수나라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가장 공이 컸지만 태자 자리가 맏형 건성에게 돌아가자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스스로 친형을 활로 쏘아 죽이며 정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중국사에서는 청나라 이전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돼 '정관의 치'라는 말을 남겼다.
죽음을 앞둔 당태종은 최고의 무신 이적이 과연 다음 임금에게도 충성을 다할지를 염려했다. 그래서 이적에게 저 멀리 변방으로 좌천 명령을 내렸다. 만약 이적이 불복하는 기색을 보이면 가차 없이 처형하라는 명도 덧붙였다. 그리고는 태자(고종)에게 “네가 제위를 승계한 후 이적을 다시 고위직으로 불러들여 그가 너의 은혜를 입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좌천 명령을 받은 이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임지로 부임했다고 한다. (만약 이때 그가 불복해서 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이적이 바로 고구려 멸망 때의 당나라 총사령관이기 때문이다.)
 
조선 이방원과 당나라 이세민은 ‘태종’이란 묘호 뿐만 아니라 형제를 죽인 즉위 과정 등 흡사한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눈물을 쏟으며 맏아들을 내쳐야 했던 사연도 똑같다. 여기다가 후대 인물인 이방원이 스스로를 중국 최고의 성군 이세민과 흡사한 인물로 보이도록 노력한 것도 원인일 것이다.
 
두 임금은 군사를 일으켜 정변으로 권력을 잡아 병사의 일에 능통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책을 많이 읽었고 상당히 역사에 밝았던 사람들로 보인다. 역사 속 성군들의 행적에 자신들의 해답이 담겨있다고 봤다.
 
수 천 년이 흘러도 사서를 통해 전해지는 성군들의 행적에 들어맞는 행동을 하고 또 자신들도 사서에 담길만한 많은 일화를 남김으로써 당시 사회를 움직이던 선비들에게 자신들이 타고난 임금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 수준에서의 미디어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브랜드’를 관리했다는 얘기다.
 
당태종은 자신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후 “위징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번 원정을 절대 말렸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삼국지 조조가 적벽대전 대패 후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이라고 발언한 것과 똑 닮은 말이다. 앞선 조조의 행적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는 담백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창업과 수성은 어떤 것이 더 어려우냐. 나는 이제 수성의 고통을 경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도 당태종과 방현령, 위징이 남긴 대화다.

위징이 이세민의 최고 명재상으로 부각된 것은 당태종의 미디어플레이가 남긴 효과다. 사실, 위징은 방현령이나 두여회에 비해 그다지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아니다. 또한 이세민이 진왕이던 시절, 태자 건성을 보필하면서 경쟁자 이세민을 죽이라는 진언까지 했었다.

이세민은 권력을 잡은 후, 위징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자신에게 쓴 소리를 쏟아내는 자리를 맡겼다. 이 과정에서 또 수도 없는 유명한 고사와 성어가 탄생했다.

무제한의 쓴 소리를 용인하는 임금. 앞선 수양제의 학정에 치를 떨던 중국이 가장 원하는 유형의 임금이었다. 위징을 중용하면서 당태종은 이같은 시대적 요구에 제대로 부응했다.

당시로서는 언론에 해당하는 사관의 구미에 딱 맞도록 처신한 두 나라 태종이다. 오늘날 태어났다면 ‘언론 플레이’의 대가가 됐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정변을 마다하지 않아 세상 두려울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이 실제로는 역사를 상당히 두려워했고 또 세상을 움직이는 지식인의 이목을 무서워했던 것이다. 숨을 거두는 날까지 이런 두려움을 끼고 살아간 때문에 혈기왕성했던 이들은 56세(이방원), 50세(이세민)의 천수밖에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덕택에 한글을 만든 세종 성군의 치세와 ‘정관의 치’가 활짝 열렸던 것이다.
 
힘이 넘쳐날수록 항상 세상을 두려워하는 덕목이 없다면 아무리 80%, 90%를 웃도는 지지율도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사례는 최근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국가 지도자의 길에는 한 치의 방만함도 용인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국가원수의 임기가 정해져 있다. 임기 동안에는 아무리 괴로워도 사람의 한계를 넘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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