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역사적 관점과 반대되는 시각에 매료되는 경향을 자주 보이고 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속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만큼 승자의 관점에서 각색 왜곡됐을 소지가 많다. 전해 내려오는 역사관을 뒤집어서 보려는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부작용이 있다. 역사적 진실에 최대한 접근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아니라 그냥 감상적인 한두 가지 사실을 확대 과장해 좀 튀어보려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산군도 알고 보니 성군이었다’는 식의 강변이다. 
 
‘무오사화를 일으키기 전 재위 초 4년 동안 연산군은 오히려 성종 때의 쌓였던 폐습을 털어내기도 했다’는 한 줄이 ‘뻥튀기’ 좋아하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연산군은 알고 보니 성군이었다’로 과장되고 나면 이게 사람들의 귀를 강하게 끌어들이는 것이다.
 
광해군의 경우는 확실히 연산군과는 너무나 다른 임금인 점은 분명하다. 그는 조선조의 ‘폭군’ 평가와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을 이유는 충분하다. 재물을 낭비해 향락에 빠진 것도 아니고 무고한 백성을 대량 학살한 것도 아니다. 임진왜란 후의 재건 작업을 침착하게 추진해간 면모도 보이고 특히 명나라와 만주족을 상대한 외교의 균형감은 그를 쫓아낸 인조를 완전 압도한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의 7년 국난에도 광해군은 단연 돋보이는 왕자였다.
 
15년을 이렇게 용상을 지킨 분이라면 아무리 폐출됐어도 묘호는 하나 올렸어야 마땅하다. ‘애(哀)’나 ‘도(悼)’, ‘민(愍)’과 같이 부정적 평가가 담긴 글자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아예 하루도 왕을 안 한 사람처럼 아무개 군(君)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훨씬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묘호를 안 올린 건 조선 왕조들어 특히 왕통을 전주 이씨 집안의 가계도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인 듯 하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실패한 임금으로 봐야 한다. 최대 이유는, 그 당시 조선사회에서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윤리적 한계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바로 인목대비의 ‘폐모’다.
 
법적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자식인 광해군이 ‘모자 관계 부존재’라고 선언한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기본 이념이 유교인 조선에서 ‘효(孝)’는 최고 덕목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산주의 노선이나 왕정복귀를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하면서 1614년 인목대비 소생의 영창대군, 그리고 1609년 광해군의 동복형 임해군 의문사까지 모두 새로운 저항의 명분으로 되살아났다.
 
적서(嫡庶. 적자와 서자)의 논란을 안고 태동한 광해군 정권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해 내내 유연한 대처를 보여주지 못했다. 끝내 어린 영창대군이 왕명에 의한 처형도 아닌, 증살(蒸殺)이란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
 
지금의 관점으로도 이는 이성을 잃은 처사에 해당할 것인데, 정권의 강경세력은 끝내 조선의 건국이념에 저촉되는 폐모까지 밀어붙이고 말았다.
 
광해군을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것이 유교적 원리주의자들인 서인이라는 것을 봐도 광해군 실패의 직접 원인은 ‘폐모’에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이른바 ‘삼창(이이첨 등 세도를 부린 세 사람 모두 창이 포함된 부원군호를 받아서 생긴 말)’이라 불리는 조정의 ‘과격 일변도’세력에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임금은 끝내 마지막 우애를 지키기 위해 ‘사사하라’는 어명을 내리지 않았지만 정권의 과격파들이 두 왕자를 암살했다. 그리고 1년의 논란 끝에 극소수 과격파가 모든 반대여론을 제압하고 인목대비 폐비 및 유폐를 밀어붙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권하자, 유교원칙에 어긋난 정책들만 철폐된 것이 아니다.
 
그의 중립외교까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저버린 것”으로 매도됐다. 이는 인조의 즉위를 승인한 인목대비의 교서에도 나타난다. 이제 조선은 두 차례 호란에 의한 극심한 침탈로 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됐다.
 
조종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실록도 아닌 ‘광해군 일기’에 그의 15년 통치가 남게 된 것은 그 시대 가치를 벗어남에 대한 호된 ‘역풍’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또한 조선왕조가 지닌 고려보다 진화된 측면일지도 모른다. 몇몇 소수 귀족의 전횡이 아닌 사대부 지식인 사회 전체가 이끌어가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실패는 특히 오늘의 민주주의 정치에서 유념해 봐야 한다.
 
정치가란 지지 세력의 대리인이다. 여야를 포괄한 정치권 전체는 그 시대 이념을 대변하게 된다. 아무리 미래 세상의 앞선 이념이라도 지금의 국민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면 그것은 극소수 진보세력 또는 미래의 정치인에게 양보해야 한다.
 
과거 이념에 매달리는 어리석음 또한 더 말할 것도 없다. 철 지난 과거 이념이나 대변할거면 한 나라의 책임을 맡겠다는 포부는 애초에 접는 것이 냉정한 판단일 것이다. 그저 사라져 가는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나 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수권정당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정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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