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전승국 중국의 공동 8.15 제안에 담긴 의미

[초이스경제 장경순기자] 지난 1994년 여름, 기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학교에 큼직한 일이 두 가지 있었다.

그해 미국 월드컵의 축구 경기장 가운데 하나를 학교가 제공했다. 여름 방학 중인데도 전혀 방학 같지 않은 그해 여름이 됐다.
 
교내 서점이 서울의 교보문고와 비슷할 정도로 큼직했는데 여기에 참가 24개국의 국기가 걸렸다. ‘도하의 기적’으로 당당히 출전하게 된 태극기도 당연히 포함됐다. 그런데 미국인들에게 건곤감리 4괘의 바른 위치 이해가 어렵다보니 태극기가 잘못 게양돼, 나와 한국학생 회장이 몇 차례 요청해서 위치를 바로 잡기도 했다.
 
계절학기 과목을 마치고 나면 교내 한 군데 모여서 대형 TV화면으로 한국의 경기를 지켜봤다. 독일에게 0대3으로 끌려가다 2대3으로 따라잡았을 때는 한국학생 20여명이 폭발할 듯 환호를 터뜨렸다. 그 와중에 백인 학생 하나는 조용하게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아마 독일 학생인데 그 자리 말고는 TV를 볼만한 다른 곳을 찾지 못한 듯 했다.
 
축구 중계 때문에 우리나라 학생들이 모일 때가 많았던 그 해 여름인데, 색다른 일로 또 한 차례 모이게 됐다. 지금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한준 교수가 주도한 모임이다.
 
용건은 조만간 일본의 아키히토 임금이 학교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학생으로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뜻에서 일본 임금의 학교 방문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한준 교수(물론 이 때는 학생이다)는 “아무리 공부하는 일이 힘들지만, 이런 일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상당히 공식적인 방문이 추진됐던 모양인데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학생회도 진작부터 강력한 비판에 나서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교민사회까지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결과, 달라이라마나 당시 망명 중이었던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아이티 대통령의 학교 방문 때와 같은 공식적이고 의미 있는 행사는 취소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미국 대학들은 잘 나가는 기업을 많이 갖고 있는 일본과의 유대를 무척 중시한다. 어떻든 일본의 임금이 학교 울타리 안에는 들러 가는 형식으로 변경해 널찍한 학교 경계선 근처에 있는 무슨 건물을 하나 방문하는 일정으로 바꾸게 됐다.
 
한국과 중국 학생들은 일본 임금이 지나가는 길목과 시간에 맞춰 함께 항의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시위 자리에 나가보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엄청난 항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특히 중국인들의 항의 열기는 대단했다. 인근의 교포들도 대거 참여하고 갖가지 피켓도 준비했다. 그 가운데는 한자로 ‘염황자손 일치단결’이라 적혔던 피켓도 기억난다. 중국 전설상의 엄청난 전쟁을 벌인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면 오늘날 중국 민족을 뜻하는 것이다.
 
일본 임금이 지나갈 도로 맞은 편에는 반대로 환영을 하기 위한 일본 학생들이 나와서 일본인들 특유의 얌전하고 차분한 태도로 길 건너편의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이곳 미국에서 알게 된 나의 지기(知己)이자 학과 친구 요시도 섞여 있는걸 보게 됐다. 참으로 말을 아끼고 자기 행동을 매우 조심스럽게 선택하는 사람이다. 전에 나와의 대화에서는 “군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별로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어떻든 집 떠나 공부하는데 자기 나라 임금이 방문하는 걸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시위대가 차지한 도로 변에는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미국의 안전요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섣부른 짓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한국에서 부르던 운동가요를 부를 수도 없고 어떻게 항의를 표시하나 했었는데, 막상 일본 임금의 차가 나타나자 자동적으로 야유의 함성과 간간이 “부끄러운 줄 알라”는 “Shame”이란 구호가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 일본 임금의 차량 행렬이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면서 미국 땅 한복판에서 벌인 우리들의 시위도 마감됐다. ‘맨인블랙’의 안전요원들은 우리에게 점잖게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건넸다.
 
2~3분이나 될까하는 시간이었지만 이 같은 의사표현의 있고 없음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을 숫자에서 압도한 중국학생들의 조직력과 열정에도 깊이 감탄했지만, 이렇게 앞장을 선 한준 교수한테는 지금도 경의를 느끼고 있다.
 
다음해 봄, 나는 이 때 일을 기억하는 흔적을 어떻게든 남기려고 했다. 귀국할 때는 자기가 타던 자전거를 반값 정도에 팔기도 하는데 나는 중국 학생회장을 만나 “싸구려 자전거지만 혹시 이 곳에 막 도착한 중국 학생들에게 요긴하게 쓰이기를 바란다”며 기증했다.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이 될 수준은 아니었지만 카오 진준이라고 기억되는 중국학생 회장은 “감사하다”며 자전거를 받았다.
 
내가 서울에 돌아오고 반년 쯤 지나, 뜻밖의 이메일을 받았다. 카오 진준이 보낸 것이다.
 
그해 8.15를 맞아 한국학생들과 체육대회를 함께 했다는 것이다. 비록 숫자에서 중국학생이 압도했고 한국학생은 9명 정도였지만 배구시합도 할 수 있었다고 그는 밝혔다.
 
소박한 자전거 하나가 이런 시도에 발판을 마련해 준 기억은 지금도 여전한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방한에서 한국과 중국의 공동 8.15 기념행사를 제안했다. /사진=뉴시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중 공동 8.15 기념식을 제안했다고 한다.
 
외교는 현실적 이해에 기초한 것이어서, 중국은 한미 동맹 관계의 재정립까지 의도하면서 이런 제안을 했을지도 모른다.
 
한국 입장에서는 현실과 명분 모두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 응답을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절대 흘려 넘길 수 없는 중요한 하나가 있다.
 
1945년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장제스 정부의 국체를 오늘날의 중국이 이어받고 있다면 이번 제안은 4대 전승국의 하나인 중국이 한국에 제시해 온 것이다.
 
우리가 가릴 것 가리고 받을 것 받는다면, 한중 8.15 공동기념은 한국 또한 사실상의 전승국이나 다를 바 없는, 다시 말해 종전 후 신생독립국 따위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전 세계에 못 박게 된다는 것이다.
 
1945년 이후 한민족의 역사가 크게 굴절된 핵심원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참전국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중국과의 공동 8.15는 논리적으로 주요 전승국 가운데 한 곳인 중국이 8.15의 의미를 한국이나 중국이나 마찬가지로 여긴다는 의미가 된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당시, 장제스 중국 총통이 “백만의 중국 군대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젊은이가 해냈다”고 격찬하며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적극 지원한 협력관계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번 시진핑 주석의 제안은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결과에 있어서, 그리고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인들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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