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 논쟁에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970년대. 장준하 교수와 젊은 재야운동가 백기완이 함께 유치장에 갇혔다. 이층침대 아래 칸의 백기완이 위에 대고 한마디 했다.

“영감, 이번에 나가면 한 마리 하셔야지요.”
 
위 칸의 ‘영감’ 장 교수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석방되자 약속대로 보신탕집에 자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나 원래 장준하 교수는 보신탕을 못 먹었다. 무척 아끼는 젊은이 백기완을 격려하려고 옥중에서 그렇게 대답한 것뿐인데 그만 실제로 보신탕집에 끌려오고 말았다. 궁리 끝에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잠시 나와 가게 뒷문으로 해서 그대로 줄행랑쳤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쫓아 나온 백기완. 다급하게 ‘영감’을 쫓아가면서 소리 질렀다. “저놈 잡아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90년대 월간지에 기고한 고 장준하 선생 추모 글의 일부 내용이다. 장준하 선생은 백기완이 비록 학력은 없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무척 아껴서 수사를 받을 때도 “백기완이를 고문 안한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절대 협조 안하겠다”고 버틴 적도 있다고 한다.
 
백 소장은 어린 시절, 이른 새벽에 아버지가 깨워서 건네주는 축구화를 받아 신었다. 그길로 황해도에서 월남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
 
“개고기 반 마리를 못 먹는 사람은 입이 짧아서 변절하기 쉽다.”
 
백기완 소장은 박정희 전두환 치세의 민주화 투쟁을 거친 재야 운동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인물이다. 그의 발언 속에는 개고기에 관한 토속 정서가 자주 드러났다. 하지만 이것은 1990년대 까지 얘기다.
 
지금은 보신탕하면 뜨거운 논란이 자동으로 벌어지고 있다. 예전처럼 마치 ‘마초이즘’을 과시하듯 보란 듯이 보신탕 먹는 얘기를 꺼내기는 좀 마땅치 않다.
 
해마다 복날이 되면, 개를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사람 중 일부가 퍼포먼스도 벌인다. 나름대로는 비장한 각오에 가득차서 나서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개고기 먹은 원로 재야운동가를 함부로 무자비하다고 비난하는 일은 없기 바란다. 오늘날 자신이 자유롭게 퍼포먼스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은, 개라도 먹으면서 모진 고문을 이겨낸 그 분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보신탕 논쟁’은 개의 복리후생보다는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지름길로 변질돼 있다.
 
보신탕 먹지 말자는 주장에 발끈해서 반발하는 사람들 자체가 보신탕을 못 먹어 안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 3년 정도 개고기집에 가 본적 없는 사람도 “보신탕 안 먹는다”거나 “보신탕 끊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나도 먹는다”고 얘기한다. “끊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마음의 확실한 결단과정을 거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조만간 먹으러 갈 계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또 앞으로 평생 안 먹게 될 소지도 다분해서 실질적으로는 ‘안 먹는 사람’인데도 “안 먹는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보신탕 논쟁을 ‘민족의 자존심’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연기로 인생 절정기를 지낸 외국의 여배우가 한국의 보신탕에 트집을 잡으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됐다. 이 여배우는 자기 나라에서 극우 정치활동에도 깊게 가담하고 있다. 이 문제가 제기됐던 1988년은 한국 정부가 올림픽 때문에 모든 것을 외국인들에게 접어주던 그런 시기다. 역사상 유일하게 서머타임제를 시행해서 올림픽 중계권료를 높이려고 시도했을 정도다. 그 바람에 보신탕집은 모두 이면도로로 숨어들고 간판도 ‘사철탕 집’으로 바꿔 달았다.
 
2000년 이후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개고기 송’을 부르면서 박지성 선수를 응원해도 이를 비하로 여기는 한국인이 거의 없다.
 
최근 들어,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도 확산되고 모든 생명의 행복도 존중하자는 시민의식이 높아졌지만 개를 먹느냐 마느냐 문제를 푸는 데는 별 도움을 못 준다. 그럼 소는? 돼지는? 반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개를 어떻게 사람하고 다르게 취급하냐”고 하면 “네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말라”거나 “소를 기르는 사람에겐 감정이 없는 줄 아느냐”는 반발이 뒤따른다. 때로는 “먹기 위해 개를 기르면서 환경이 파괴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은 사실 채식주의를 오로지 보신탕에게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단, 보신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행위를 하는 것은 이제 누구에겐들 용납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몰라서 먹는다는 방조 자세부터 엄격하게 근절할 필요가 절실하다.
 
정치문제 비슷하게 보신탕 문제 또한 자신만의 가치체계를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아무런 해결도 얻지 못하고 있다. 수 천 년의 삶을 이어온 내 겨레를 스스로 야만인으로 몰아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대로, 비록 오랫동안 우리의 언어와 습속에 녹아들어간 것이라 해도, 굳이 들이대면서 불쾌감을 강요하는 일도 없어져야겠다. 예전 같으면 보신탕이나 복날이 낄낄거릴 만한 대화소재였는지 몰라도 오늘날엔 살기를 느끼고 불편하게 여길 사람이 최소 한 두 명쯤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기 쉽다.
 
자기감정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보다 상대방을 서로 배려하는 자세부터 갖췄으면 하는 게 보신탕 논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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