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훗날 토대를 지킨 사람

[초이스경제 장경순 편집장] 김성한의 소설 고려태조 왕건의 일부부터 소개한다.

포석정을 습격해 신라 경애왕을 죽인 견훤의 살기가 경주 시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비어있는 왕위에 견훤은 김부를 앉혔다. 김부는 화랑 김효종의 아들인데 김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견훤에 대항해 끝까지 저항하다 순국한 용사다.
 
견훤은 “나는 용사를 좋아한다”며 김부를 왕위에 앉힌 것이다. 김부는 ‘용사 아들’의 이미지와 달리 덜덜 떨며 견훤에게 여러 번 절을 하고 왕위에 앉았다. 비록 신라왕이 됐지만 견훤을 상보로 섬기기로 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김부(경순왕)가 고려에 항복하고 태자보다도 높다는 정승공의 높은 지위를 받고 개경으로 이사를 왔다. 앞서 이미 고려에 항복한 견훤의 집을 찾았다. 경주에서는 상보로 섬겼지만 여기서는 김부의 지위가 더 높아졌다. 김부는 어색한 차 한잔만 나누고 도망치듯 견훤 집을 나섰다.
 
견훤으로 인해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경순왕의 소설속 모습이다.
 
▲ 경순왕 영정.
고려 왕조에는 태종이 없다. 한국과 중국의 왕조에서 태종이란 묘호를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향의 업적이 필요하다.
 
우선, 왕실의 기틀을 단단히 세워야 한다. 그리고 후세 모든 임금들의 조상이 돼야 한다. 고려왕조는 이 조건에 해당하는 임금이 8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이 임금이 승하한 때는 고려가 개국하고 113년이 지났으니 그때서야 태종이란 묘호를 올리기도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고려사에 태종이 없는 사정에도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관계돼 있다.
 
경순왕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임금들과 상당히 다른 생애를 보냈다. 우선 그는 91세의 엄청난 장수를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생년이 불분명하지만 927년에 왕이 돼 978년에 사망했다. 그동안 고려 임금 다섯 명을 봤다.
 
망국의 임금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화병으로 죽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는 자살을 하기도 한다. 죽이지 않아도 괴로움을 못이기는 것이다. 임금들의 왕통에 대한 예외 없는 애착은 광해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조반정의 순간, 광해군은 창덕궁의 종묘 쪽 전각에 불이 붙은 것을 종묘에 불이 난 것으로 잘못 알고 “300년 사직이 나에 이르러 망하는구나”고 한탄했다고 한다. 연산군도 마찬가지지만 역성혁명이 아니고 반정이라는 사실에 그나마 안심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임금들의 공통 심리다.
 
최근의 중국 드라마 삼국지에서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조비의 암살을 가장해 사실은 자살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가라앉는 배속에서 “어떻게 조상들을 뵙겠느냐”고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사실 헌제는 암살당하지도 자살하지도 않고 산양공으로 그럭저럭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유비가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조비의 헌제 시해설을 퍼뜨린 것이다.
 
어떻든 경순왕은 망국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90세를 넘도록 속 편하게 장수하는 강인함을 보여줬다. 바로 앞선 경애왕 때 견훤의 도륙으로 인해 이미 신라는 망한 것과 다를 바 없어서 경순왕의 책임이 거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경순왕의 항복이 고려와 신라의 동맹을 뜻하기 때문이다. 경주 세력을 대표하는 경순왕이 건재해야 신라 사람들의 이해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경순왕과 보장왕, 의자왕의 호칭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경순왕이란 시호는 그가 죽은 후 고려 왕실이 왕에 해당하는 예우로 올린 왕호이다. 비록 ‘천리에 순응해 항복을 잘 한 것’이란 뜻이 들어있겠지만 어떻든 왕의 대접을 받은 호칭이다.
 
반면 의자왕의 의자와 보장왕의 보장은 시호가 아니라 두 임금의 휘(諱), 즉 이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백제왕 의자, 고구려왕 보장이 된다. 당나라 관점에서는 주변의 적대국을 멸망시킨 것이지 이들 나라의 왕통을 존중하거나 이어받을 일이 없었으니 두 임금에게 왕의 대접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아쉬운 것은 신라가 이들에게 경순왕과 같은 왕의 마지막 예우를 하지 않은 점이다. 삼국시대 종료 후 신라가 두고두고 고구려, 백제 잔존세력을 불안해하다 끝내 그로 인해 망한 것과도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의자왕이나 보장왕에 비하면 경순왕의 팔자는 너무나 달랐다. 고려임금 왕건은 신라 항복 후 김부(경순왕)를 정승공에 봉해 그 지위를 태자보다도 윗자리로 예우했다. 한국 역사에서 이렇게 저군(태자나 세자)보다 높은 지위를 살아서 누린 사람은 조선 후기의 이하응이 유일하다.
 
그러나 경순왕이 ‘불멸의 정승공 김부’가 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여기에는 남녀 간의 파란만장한 연애스토리가 결부된다.
 
고려태조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에게서 25남9녀를 얻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호색한들이 그다지 좋아할만한 형편은 아니다. 조선의 태종이나 성종과 달리 왕건은 상당히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런 결혼생활을 했다.
 
▲ 고려태조 왕건의 가계도. 한 페이지로 부족하고 두 페이지를 다 채울 정도로 엄청난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는 호족 연합을 위한 혼인동맹을 했기 때문이다. /한권으로읽는고려왕조실록.

고려는 호족 연합적 성격을 지닌 국가다. 후삼국 쟁패기에 각처의 유력한 호족과 연합을 맺은 힘으로 통일을 이룩했다. 호족들에게 왕건이 신뢰를 얻은 가장 흔한 방법이 혼인동맹이다. 단순히 그 집의 딸만 데려오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여기서 아들이 탄생해야 혼인동맹이 완성됐다. 그래서 왕건의 25남은 몇몇 부인에게만 몰려 있지 않고 한 두 명씩 골고루 분산돼 있다.(예외 신명순성왕후.)
 
신라 경순왕의 항복도 일종의 호족연합이다. 오히려 왕건에게는 지금까지 모든 연합보다도 더 짭짤한 연합이다. 신라 1000년 사직을 흡수하는 것도 엄청나지만 막강한 경주의 경제력을 얻게 됐다. 신라의 저력이란 파탄난 군사력만으로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이런 판단이 왕건과 견훤의 핵심적인 차이다.
 
당연히 경순왕과도 혼인동맹을 맺어야 했다. 특히 경순왕을 우대해 왕건은 자기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과 결혼시켰다. 경순왕도 딸을 왕건에게 보내야 했지만 마땅한 딸이 없었다. 그래서 왕족의 딸 중에 고르고 골라 김억렴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냈다. 당시의 예법으로는 경순왕의 양녀로 삼는 절차가 앞섰을 것으로 보인다.
 
곱게 자란 왕족의 딸 중에서 고르고 골랐으니 난세였던 후삼국시대 웬만한 사람은 구경도 못할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의 ‘우월한 DNA’ 보유 여성으로 보면 되겠다.
 
이미 환갑이 돼가고 있는 왕건이었지만 또 한번 기력을 발휘하셔서 김씨 왕녀와의 사이에 아들 욱을 낳았다. 왕욱은 어머니의 ‘우월한 DNA’를 물려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로 인해 엄청난 왕실 스캔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5대 임금 경종이 죽고 왕욱의 조카인 성종이 즉위했다. 이제 막 세상을 등진 경종은 헌애왕후(천추태후)와 헌정왕후 두 자매를 부인으로 뒀다. 아들이 있는 언니 헌애왕후와 달리 헌정왕후는 외로움을 달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왕실의 우월한 왕욱에게 돌아가는 눈길을 막기 힘들었던 것이다.
 
왕욱과 헌정왕후의 밀애는 임신으로 결실을 맺었다. 철저히 비밀에 붙여 만삭에 이르도록 아무도 몰랐다고 하지만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숙부와 형수의 불륜은 성종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이때는 이미 경순왕도 세상을 떠난 후다. 살아있었으면 신라 왕실의 대표어른으로 좀 곤혹스러울 수도 있었겠다.
 
헌정왕후는 고뇌가 가득한 출산을 하면서 필사의 힘으로 아이를 세상에 남겨놓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불륜남 왕욱은 귀양을 갔지만 성종은 그에게 아이의 양육 책임을 맡겼다. 그나마 다섯 살 때 아버지 왕욱마저 세상을 떠났다. 아이는 그 후 강제로 출가도 하는 등의 고난의 삶을 지속했다.
 
얼마 후 고려왕실은 목종이 즉위하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간통으로 엄청난 혼란에 빠져든다. 육군 총사령관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천추태후 세력을 몰아냈다. 왕손을 옹립해야 했는데 개국 이래 수차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거듭되다 보니 태조 왕건의 25남 혈통도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하나. 고난 속에 태어나 강인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왕욱의 아이 뿐이었다.
 
불륜의 태생으로 핍박받던 아이는 유일한 왕손으로 옹립돼 고려 8대 임금이 됐다. 동북아시아 패권국 거란의 요나라와 세 차례나 싸워 이겨 500년의 굳건한 국방의 기틀을 마련한 현종이다. 현종의 혈통은 이로부터 고려 마지막 날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에 바쳤지만, 그의 양녀에 해당하는 여성의 소생이 고려의 500년 사직을 함께 했던 것이다.
 
▲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소배압이 이끄는 10만대군을 무찌른 귀주대첩도 고려 현종때의 일이다.
 
신라가 망하던 날, 고려에 복종을 거부한 마의태자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경순왕의 아들로 끝까지 신라를 지키자고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민간에서는 청나라 누르하치 집안을 마의태자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누르하치 집안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이기 때문이다. 청나라 전성기 4대 강희황제의 이름은 애신각라 현엽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마의태자의 자손이기 때문에 신라를 깊이 새기는 성을 가졌다는 건데, 사학적으로는 입증이 안된 얘기다. 그러나 만약 이 또한 사실이라면 경순왕은 그야말로 ‘불멸의 수퍼 경순왕’이 되는 것이다.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모습도 김성한 소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왕이 돼서는 잠저에서 지녔던 용의 기상마저 잃어버린’ 그저 좋은 게 좋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시호처럼 시대의 흐름에 절대 거스르지 않아서 훗날의 큰 일을 위한 토대를 지킨 사람으로 봐야겠다.
 
[사족] 독자들께서 눈치채셨겠지만, 기자가 어릴 때 형들로부터 경순왕과 관련한 놀림을 받곤 했었다. 그러나 경순왕과는 특별한 혈통 관계가 없다. 이 시대 기자의 조상은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장길 시조다. 안동장씨와 인동장씨의 시조가 되는 분이다. 왕건과 대치한 견훤의 배후를 신라 왕족 출신 호족 김선평이 부장 장길, 권행과 함께 공격해 대승의 전기를 마련했다. 고려에서 세 사람을 삼태사로 높이 추앙했고 세 집안이 형제를 맺은 것이 서로 결혼을 안하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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