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전철환 총재 10주기 두 달이 지나도록 한은은 감감무소식

[초이스경제 장경순 편집장]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두 아들의 결혼식을 한은 직원들에게 조차 비밀에 붙인 일을 얘기할 때 조심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행여 이분이 청렴하고 몸가짐에 철저했던 것으로만 평가될까 하는 우려다. 인품은 훌륭했는데 정책당국자로서, 통화정책의 최고 수장으로서 평가는 전혀 별개였던 그런 분이라면, 전철환 총재 이후 후임자 세 명이 모두 임기를 채우는 지금과 같은 한국은행의 위상은 절대 실현 불가능했을 것이다.
 
간혹, 전철환 총재 재임 때 스스로 불이익을 받았다며 비난하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얘기는 대부분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예전에 하던 대로 하면 나한테 돌아올 자리인데 왜 관행과 달리 다른 사람에게 줬느냐하는 차원으로 들리는 경우다.
 
이 나라에 제대로 금융시장이 형성되고 금융당국이 정상 가동한 것은 1998년 이후다. 관치금융만 일삼다 전대미문의 국난을 겪어 금융체계가 완전 파괴된 폐허에 새롭게 뜻을 모아 진정으로 ‘위험을 매개 삼아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금융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의 재임 중 모습.
 
1998년 전철환 총재의 흔들리지 않는 채권 유통시장 소신으로 사실상 처음으로 채권 유통시장이 형성된 것은 금융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장 친화 정책’이란 것이 무언지, 정책이 시장과 소통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준 분이 전철환 총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국내총생산(GDP)이나 물가상승률 못지않게 일관된 경제지표와 마찬가지로 존중 받았다.
 
금융 시장에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오늘 어떤 얘기를 할지, 또 여기서 어떤 정책이 파생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의 후임인 박승, 이성태, 김중수 총재가 모두 임기를 채우고 지금의 이주열 총재에 이른 것은 전적으로 전철환 총재가 굳건히 심은 통화정책의 신뢰성 덕분이다. 전 총재 이전에는 임기를 채운 총재가 극히 드물었고 임기를 채운다 해도 ‘미스 X’라는 별명에 시달리기도 했다. 정부말만 잘 들어서 임기를 채웠다는 비아냥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아까운 큰 인물이 안타깝게도 2004년 6월 17일 밤, 병원에서 수술을 받던 도중 운명을 달리 하셨다. 올해는 전철환 총재 타계 10주기가 되는 해다.
 
그런데 기일이 두 달 넘게 지나도록, 누구 하나 전철환 총재가 남긴 정책 철학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당사자인 한국은행조차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훌륭한 경제계의 어른을 배출한 기관이면서도 이렇다 할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런 현상이 행여나, 전철환 총재가 ‘한은 선배’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소아병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사실, 한은 사람들이 시장 친화에 있어 특히 많은 문제를 표출했던 박승 전 총재에 대해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는 모습을 보기는 했다. 박 전 총재는 한은에서 온 나라에 소문난 ‘천재 대리’로 근무한 적이 있는 ‘한은 선배’다.
 
김중수 전 총재에 대한 한은의 평가는 매우 사납다. 직원들 게시판을 들척거리면서 시비를 일으킨 사람이니 좋은 소리 듣기를 본인도 기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한은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비난이 더욱 격화된다면 이는 다소 유감스런 일이다.
 
김 전 총재는 비록 부임당시 ‘MB맨’이란 의혹을 초래했지만, 그가 고군분투하며 고수해 온 통화정책의 독립성은 지금의 박근혜 정부에서 소중한 ‘쌈짓돈’으로 남아있다. 
 
물론, 내 직장 출신 선배에 각별한 호감 갖는 자체를 그러지 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철환 총재는 이같은 소아적인 집단 정서 때문에 평가가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가 활성화시킨 국채시장만 해도 전문가 그룹에서는 유전 10개 이상의 혜택을 한국 경제에 안겨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때마다 전 세계 유수 언론의 취재진이 한은 기자실로 모여드는 것은 전철환 총재가 확고하게 정착시킨 통화정책 시스템을 뉴욕, 런던, 싱가포르의 금융시장에 실시간으로 전하기 위해서다.
 
준비되지 못한 마지막을 맞이하다 보니 전철환 총재는 이렇다 할 유고집을 남긴 것이 별로 없다. 수많은 세월 기고한 문집이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분의 경제철학은 신용협동조합과 같은 서민 금융에서부터 거시 경제에 이르는 엄청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렇게 큰 분을 떠나보낸 한은이 10년이 되도록 이분의 이름으로 세미나 한번 제대로 연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다니 이제는 좀 화가 나기까지 한다.
 
국정감사장에서는 언제나 서릿발 같으면서도 감히 의원들이 트집 잡을 수 없는 철저한 철학으로 일관하신 분이다. 첫마디 덕담에 가벼운 언사로 편승하다 바로 의원들의 핀잔을 듣는 모습 따위는 전철환 총재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2001년 국정감사의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전 총재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한숨이 섞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느낌은 ‘아 이 분이 이번 국감을 마지막으로 생각 하는구나’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다음 해, 자리는 물러났어도 그 큰 이름의 무게를 이 나라는 차마 놓을 수 없었다. 공적자금관리 위원장의 커다란 부담을 지워드렸다. 그런 세월을 겨우 2년이나 보낸 어느 날 솔뫼 전철환 총재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전 총재의 차남인 전종규 서울대 법대 교수는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 쓰시던 서재에 들어서니, 수첩이 열린 채, 어느 날 누구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고 전했다.
 
경제 정책의 난맥이 거듭될 때마다 더욱 간절히 떠오르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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