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검의 더키 박사는 "미스터 팔머" 호칭을 고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미국 드라마 NCIS가 오랜 세월 최고 인기를 누리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중년의 카리스마 깁스 반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엽기적인 수다 검시관 더키 박사, 신뢰감과는 완전 담을 쌓은 듯해도 필요할 때 ‘넘버2’의 내공을 입증하는 토니, 영원한 프로비 맥기, 여기다 더키 박사와 알게 모르게 4차원의 영역다툼을 하는 보조검시관 지미 팔머까지 어디 하나 비는 라인업이 없다. 야구로 치면 1번부터 9번이 모두 골든 글러브 수상자들이다.

여기다 익살스런 스토리는 다른 수사물과 차원을 달리한다. 이런 시트콤 같은 성격이 없었으면 NCIS는 가장 암울한 드라마가 됐을 지도 모른다. 주인공 수사관들을 거침없이 죽이는 드라마가 또 NCIS이기 때문이다. 겨우 두 시즌이 끝나자마자 홍일점인 미녀 수사관 케이트 토드가 저격으로 사망했다. 5시즌이 끝났을 때는 중년 여성의 이끌림을 자랑하던 제니 셰퍼드 국장이 무수한 괴한과 필마단기로 싸우다 죽었다. 죽는 날까지 깁스를 ‘프로비’라고 부르던 멘토의 상징 마이크 프랭크스는 시즌 9쯤에서 죽었다.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오늘 에피소드에서 절대 안 죽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는 드라마다.
 
▲ NCIS의 깁스 수사반장(왼쪽)과 고참 수사요원 토니 디노조. /CBS 홈페이지.

한국 사람들한테는 또 다른 차원에서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있다. 미국 사람들의 직장 생활이 어쩐지 한국 문화스럽다는 점이다. 반장이 수사관들 뒤통수를 때리는 장면은 사실 왕년의 최불암 반장도 조경환 김상순 형사에게 감히 하지 못하던 가부장의 전형이다.
 
상하간의 호칭에도 권위주의적이거나 약간은 남녀를 달리 대하는 요소가 섞여 있다.
 
깁스는 토니를 그의 성(姓)인 디노조라고만 부른다. 컴퓨터 광 맥기도 팀이나 티모시라고 부르는 적이 거의 없다. 반면 수하의 여성들은 토드, 애비, 지바 등 퍼스트 네임으로 호칭한다.
 
깁스가 딱 한 차례 맥기를 팀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케이트가 아리에게 피살당한 직후다. 깁스가 극도의 분노와 동시에 더 이상 내 사람을 잃을 수 없다는 보호본능에 완전 함몰돼 있을 때다. “팀 괜찮냐”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우자 당사자 맥기를 비롯해 수사팀 모두가 영문을 몰라 ‘뒷담화’를 벌이는 장면도 나온다.
 
부검의 더키 박사도 마찬가지다. 자기 아랫사람인 보조부검의 지미 팔머에게만 “미스터 팔머”라고 부른다. 수직관계가 아닌 수사팀의 젊은 요원들에게는 이름(first name)을 불러준다. (1970년대 올드 팬들에게는 놀라운 얘기일 수도 있는데, 말 많은 더키 박사 역의 배우가 MBC 첩보원 0011에 과묵한 러시아계 주인공으로 나온 사람이다.)
 
▲ NCIS의 엽기수다 부검의 도널드 말라드 박사(왼쪽)와 1970년대 '첩보원 0011'의 과묵한 러시아출신 주인공 일리야 쿠리야킨. 모두 데이비드 맥컬럼이 연기했다. NCIS에서는 애비 슈토가 증인 설명대로 용의자 인상착의를 그렸는데 오른쪽 그림이 만들어지자 "이건 더키 박사네"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더키박사도 딱 한번 팔머의 이름인 “지미”라고 외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사건 현장에서 팔머가 범인으로부터 총격을 받았을 때다. 팔머는 무사했지만 총성을 들은 더키 박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이름을 다급하게 질렀다. 이 때만 빼놓고 지미 팔머는 여전히 “미스터 팔머”다.
 
자기 아랫사람한테는 편하게 친한 감정을 자제하는 직장문화가 이들의 호칭에서 엿보인다.
 
이런 것이 NCIS문화인지, 아니면 미국 동부의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 학교의 박사급 사제 관계는 옆에서 좀 지켜본 것이 있다.
 
1994년 내가 있던 샌프란시스코 근처 학교에는 통계학의 역사를 혁명적으로 바꾼 브래들리 에프론 교수가 학과장으로 있었다. 1980년 붓스트랩 기법을 개발한 바로 그 사람이다.
 
어느 날 학과 PC실에 들렀는데 당시 20대 중반 정도였을 박사과정 학생 하나가 있었다. 방을 들어선 에프론 교수에게 이 학생이 건넨 말은 “Hey Brad, what’s up?”이었다. 우리 말로는 “야 브래드, 별일 없어?”라고 해석해야 만점을 받을 소리를 당시 이미 50대는 됐을 학과장 교수에게 던진 것.
 
에프론 교수는 이 친구에게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라고 호통을 친 게 아니라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Not much”라고 응대했다.
 
내가 제롬 프리드먼 교수에게 “교수님(Professor)”이라고 부르자 그 교수가 농담조로 “Yes, sir”라고 대답한 것도 내가 알고 있던 사제간의 예의하고는 참 많이 다른 문화를 시사했다. 그에게 논문 지도를 받던 여학생은 그를 “제리”라고 불렀다.
 
당시 교수진 가운데 사람들이 유일하게 성과 함께 교수님으로 부른 분이 대만에서 온 라이체룽(李子良) 교수다. 워낙 연배가 있고 또 동양적 문화를 가진 분으로 여긴 때문으로 표면적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아마 이분 이름의 발음이 어려웠던 것이 더 큰 이유다. 라이 교수의 인품으로 봐도 누가 “체룽”이라고 부르는 걸 꺼려했을 분도 아니다.
 
그로부터 4년 후엔 동부의 학교에서 1년 시간을 보냈는데 문화가 좀 달랐다.
 
강산이 40%쯤 변했을 세월인데, 오히려 시간은 뒤로 간 듯한 느낌도 좀 났다. 학부생도 아니고 교수들과 동고동락한 대학원생들인데도 함부로 교수 이름 부르고 다닐 분위기가 아니었다.
 
도로의 자전거 문화만큼이나 서부와 전혀 다르게 한국 모습과 많이 비슷했다.(서부에서는 학교 밖 도로에서도 자전거를 탄 나를 보고 차들이 서행을 하는 모습이 많았는데 이곳에서는 학교 안 도로에서도 나를 향해 빵빵거렸다. 그래서 안 쓰던 헬멧을 사서 쓰고 다녔다.)

내 느낌에는 코스웤도 끝내고 퀄리파잉도 통과한 3년차쯤부터 진정한 식구처럼 지내라는 훈육성 차별도 담긴 듯 했다.
 
그러나 이게 딱히 동부와 서부 차이라고 잘라서 말하기도 어렵다.
 
그냥 자기가 속한 사회의 분위기 빨리 파악해서 순조롭게 잘 지내는 게 최고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어 배우는 아이들에게 요즘은 여성도 미혼 기혼 구분 안하고 ‘Ms.’로 호칭한다고 가르쳐줄 거면 개중에는 ‘Mrs.’로 안 불렀다고 야단치는 할머니가 여전히 계실 수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려줘야 한다. 이런 예외적인 분들의 존재는 동부 서부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애들 영어 가르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